평양의 봄, 기성도병
- 유물명 평양의 봄, 기성도병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1812 기성도명 세로155.5cm, 가로 53.5cm, 전체길이 408.0cm
-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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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도병(箕城圖屛; Map of Pyungyang and Depicting Parade of The Pyungyang Administrator) 19세기
꽃망울이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주말마다 사람들이 야외나들이로 점차 분주해지는 봄이 찾아왔다. 서울의 봄은 이러한데 평양의 봄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평양의 봄을 완연하게 담은 ‘기성도병(箕城圖屛, 서울시유형문화재 176호)’을 통해 살펴보자.
조선시대의 평양은 한양과 더불어 행정적으로, 또 상업적으로 가장 큰 도시로서의 위용을 가진 곳이었다. 평양은 기성(箕城)·낙랑(樂浪)·서경(西京)·서도(西都) 등 다양한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그 중 ‘기성’은 평양이 고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터전이었음을 의미하며 ‘서경’과 함께 평양의 별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평양에서 가진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이 이미 15세기에 그려졌다. 그러나 명승명소(名勝名所)와 같은 경관 그 자체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실경 산수화는 17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나아가 양란의 피해 복구가 마무리되고 대내외 정세가 안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18세기에는 상업과 무역의 성행에 힘입어 평양이 한양 다음가는 도시로 부상하였고 평양기성도에 대한 수요도 동반 상승하였다. 당시 평양은 재화가 풍성하고 풍류가 넘치는 유락(遊樂)의 도시로 이미지화되어 세간에 평양을 동경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다. 또한 중앙으로 진출하여 명성을 날린 화가를 배출할 정도로 지역 출신 화가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그와 같은 분위기는 다채로운 형식과 내용의 평양기성도가 제작, 유통되는 데 일조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기성도병(서1812)>는 평양성 일대 풍경과 평안감사 행렬을 담은 작품이다. 연폭의 대형 화면에 평양성의 전경(全景)을 묘사한 평양도병은 지금까지 상당량이 전하지만, 화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작품은 아직 없다. 평양성도 병풍은 행렬도의 유무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애초에는 산수만으로 그려지다가 행렬도가 부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성도의 연원은 평안감사로 부임한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1590년(선조 23)에 간행한 『평양지(平壤志)』의 판화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에 있다고 여겨진다. 이후 시대가 내려오면서 행렬도나 민속놀이가 더해지는 등 기록화 및 풍속화의 요소가 접목된 것이다.
이 작품은 폭이 4미터나 되는 화면에 걸맞게 평양성과 대동강, 그리고 인근의 산악 풍경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동쪽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가 적용되어 전체적인 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1~2폭에는 영명사(永明寺)가 위치한 북성(北城)과 그 너머 북쪽 연봉이 담겼고, 화면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제3~5폭에 내성(內城), 즉 평양성의 중추가 되는 시가지를 포치하였다. 이어서 제6폭에 중성(中城)을, 제7~8폭에 기자 정전(井田)의 유허(遺墟)로 전해지던 외성(外城)을 담았다. 견고한 석축에 감싸인 내성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대로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었고 선화당(宣化堂)과 대동관(大同館) 등 주요 관서와 누정, 민가가 밀집되어 있다. 그 밖의 지역은 대체로 자연지형이 보존된 가운데 산언덕과 수목(樹木), 건물 등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하단에는 평양성의 삼면을 끼고 흐르는 대동강(大同江)과 십리장림(十里長林)이 이어지며 강 가운데 양각도(羊角島)와 능라도(綾羅島)가 보인다. 화면 하부의 대동강으로부터 점차 상부 연봉과 원산(遠山)으로 전개되는 원근감, 그리고 평행사선투시법의 적용에 의해 합리적인 공간감이 연출되었다. 화가는 수묵과 담채, 진채를 적절히 안배함으로써 평양성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경물의 세부로 시선을 옮기면, 우선 산언덕과 토성 부분에 청록채색 기법을 적용하였다. 완만한 굴곡으로 이어지는 산과 구릉에 거친 피마준(披麻皴)과 함께 녹색을 주조로 청색과 갈색 진채가 곁들여져 있다. 성곽이나 누대, 전각은 계화법(界畵法)으로 반듯하게 형태를 잡고 채색으로 치장하여 일반 민가와 구별시켰다. 각종 수목은 먹과 담채로 표현하되 드문드문 연분홍 복사꽃을 그려 넣어 춘색(春色)을 암시한다. 강물에는 청색 담채를 풀어 황포돛배와 조화시키고 배 주변에 수파묘(水波描)를 더했다.
주인공인 감사는 제2폭의 정자선(亭子船) 안에서 기생들과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지붕 위에 “上船(상선)”이라는 묵서가 있다. 신분과 직급에 따라 복색을 달리한 관원과 병사들이 정연한 대오를 형성하며 대동문(大同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화면의 전체 규모와 경물간의 비례를 따져보면 이 행렬 부분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 한 예로 평안감사의 체구는 능라도의 집 한 채보다 크다. 또 인물간의 비례도 맞지 않아서 지위에 따라 차등적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성도>에서 평안감사 행렬은 평양성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제작의도를 구현하는 데 있어 산수와 행렬의 산술적 비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또 실존 인물의 행적에 근거한 행렬도가 아니고 하나의 도상(圖像)으로 정착된 이후의 작례라 생각되며, 패턴화된 구성과 내용, 채색법과 세부표현법, 인물의 신체 비례 등에 나타난 특징을 종합해 볼 때 19세기 화원화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감상을 위한 회화예술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평양지역의 자연지리는 물론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인문지리적 정보까지 제공하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겸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