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유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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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경리도감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명나라는 조선에 주둔한 명군을 지휘하기 위해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파견하였다. 조선에서는 명나라 사신의 영접을 위해 도감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양호에 대한 의전과 응대의 업무를 담당하게 할 목적으로 경리도감(經理都監)을 설치하였다. 경리도감은 양호의 후임으로 파견된 만세덕(萬世德)이 명나라로 돌아간 1600년 9월까지 3차례 설치되며 지속되었다.

경리 양호와 만세덕은 본래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파견되었으나 지나치게 내정을 간섭하거나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물력을 요구하여 경리도감 관원들을 괴롭게 했다. 심지어 만세덕은 자신의 가족을 위한 금품을 요구하기도 했다. <선조실록>을 담당한 사관은 만세덕을 탐욕스러운 인물로 평하면서 중국에 인물이 없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고압적이고 탐욕스런 명나라 경리를 직접 응대해야 했던 경리도감 관원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경리도감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경자관반계첩>

 

1600년 가을이 되자 전쟁의 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고, 만세덕도 마침내 명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에 따라 경리도감의 업무 종료를 눈앞에 두게 되니, 3년 동안 밤낮 없이 함께 일했던 관원들은 나름의 감회가 적지 않았다. 도감에서 보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관원들이 함께 일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관원들의 명단을 기록하여 첩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경자관반계첩(庚子館伴契帖)>이다. ‘경자’는 계첩을 제작한 해인 경자년(1600)을 뜻하며, ‘관반’은 경리도감 관원을 뜻한다.

 

 

 

경자관반계첩의 구성과 현재까지 전하는 계첩들

 

‘계회(契會)’는 본래 친목 모임을 이르는 말이며, 계회의 모습을 그린 것을 ‘계회도’라고 한다. 계회도에는 모임에 속한 인물들의 관직과 이름 등을 기록한 좌목이 함께 수록되고, 모임의 경위를 기록한 서문이나 시를 써 넣기도 한다.

조선 전기에는 한 면에 시, 계회도, 좌목을 모두 넣어 계축(契軸)의 형태로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여러 페이지로 구성된 첩장(帖裝)의 형태로 제작하는 계첩(契帖)이 유행하였다. <경자관반계첩>은 그 이름과 같이 계첩으로 제작한 것으로서, 경리도감 관원들의 모습을 그린 계회도 2면, 심희수가 쓴 서문 3면, 관원들의 좌목 3면의 총 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첩은 보통 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숫자만큼 제작하여 각자 하나씩 소장하였는데, 계회도는 여러 화원이 그리는 경우가 많아서 계첩마다 그림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또 계첩의 명칭인 표제도 소장자마다 다르게 기재하기도 하였다. <경자관반계첩>은 좌목에 기록된 관원 수대로 20점을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계첩은 3점으로 확인되는데,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황화사후록(皇華伺候錄)>이고, 하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관반제명첩(館伴題名帖)>이며, 나머지 하나가 바로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자관반계첩>이다.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한 계회도와 서문, 좌목을 수록하고 있으므로 같은 시기 제작한 계첩임을 알 수 있다.

 

 

<경자관반계첩>의 계회도

 

 

계첩에 수록된 그림은 1598년 겨울 서대문 밖 영은문(迎恩門) 인근의 실경을 배경으로 만세덕의 영접을 준비하는 경리도감 관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 아래쪽에는 초석 위에 세워진 홍살문이 있는데, 당시 영은문 모습으로 추정된다. 본래 영은문 위에는 청기와가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다가 임시로 복구한 것이 그림 속의 영은문이다. 중앙에는 연향대(宴享臺)가 있고, 그 위에 장막을 설치하여 영접을 준비하는 경리도감 관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관원 몇 명은 탁자에 앉아 논의하고 있고, 다른 관원들은 장막 주변에서 시위하거나 각자 맡은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 연향대 왼쪽에는 가마가 놓여있다. 경리 만세덕은 1598년 11월 25일 한양에 도착하였고, 이 때 선조가 직접 모화관으로 와서 만세덕을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그림은 이 날 경리도감 관원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림 속의 가마가 선조의 행차를 표현한 것인지, 만세덕의 영접을 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위쪽에 그려진 산은 도성 서쪽으로 뻗은 인왕산으로서 산등성이에 한양도성의 성벽이 늘어서 있다. 하단에는 상단의 산세와 대비되는 벽돌담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계첩인 <황화사후록>이나 <관반제명첩>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계첩 제작 당시에 그린 것이 아니라 후대에 손상된 그림을 보수하기 위해 덧칠하면서 잘못 그려 넣은 것으로 보인다. 자세히 보면 벽돌담의 위치에 물줄기가 그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용산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들었던 만초천으로 보인다. 즉 본래 그림은 위로 인왕산, 아래로 만초천이 둘러싼 연향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림의 원형은 <황화사후록>과 <관반제명첩>의 계회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 중기의 기록화이자 실경산수화

 

<경자관반계첩>에 수록된 그림은 조선 중기의 기록화이자 실경산수화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른 관서의 계회도와 달리 업무 모습을 기록화로 남긴 점은 임시관청이었던 도감의 계회도가 보여주는 독특한 특징이다. 또한 이 그림은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기 이전인 조선 중기의 한양 실경을 그린 흔치 않은 그림이다. 이보다 약 200년 후에 그려진 <경기감영도>의 인왕산 그림과 비교해보면 산세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경자관반계첩>의 그림이 당시 서대문 밖의 실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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