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왕씨王氏 가문의 이주민 기록,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
- 유물명 명나라 왕씨王氏 가문의 이주민 기록,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기5964_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_1818년
서기5943_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_19세기
서기5939_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_1976년 - 첨부
사진 확대보기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의 편찬 배경
우리박물관에는 명나라 유민의 후손인 왕석산‧마옥희 님이 자신들의 유산으로 고이 간직하다가 2013년에 기증한 자료들이 있다. 이들 중에서 유민들의 의식을 잘 반영해주는 자료가 있으니 바로 황조유민록이다. 책의 이름을 보면, 명나라 황제국 유민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중국 심양에서 봉림대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이후, 대대로 조선에 살고, 조선인과 혼인하였다. 그러면서도 명나라 황조의 백성이란 의식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왕이문(王以文)의 5대손인 왕덕구(王德九)는 스스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겨서 후세에 전하려는 뜻으로 황조유민록을 제작하였다. 작자는 이 책에서 그들이 조선에 온 이후에도 명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음을 알리고, 앞으로도 면면히 계승할 것이라는 의지를 담았다.
황조유민록(皇朝遺民錄)의 내용은?
이 책은 명나라가 망한 뒤에 봉림대군을 따라서 내려온 인사들에 대한 전기이다. 수록된 인물들은 왕이문(王以文)을 비롯하여 양복길(楊福吉), 풍삼사(馮三仕), 왕문상(王文祥), 배삼생(裵三生), 왕미승(王美承), 정선갑(鄭先甲), 황공(黃功), 유계산(柳溪山) 등 9명으로 대개 중국 부현(府縣)의 학자층이다. 작자인 왕덕구는 유민들 각 집안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어렵게 한 책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개개인에 대한 행적은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본문 맨 앞에 소개되는 왕이문은 이 책을 지은 왕덕구의 5대조가 된다. 그는 중국 제남(濟南)에서 태어났으며 15세 되던 때인 1636년 청인들에게 잡혀 심양에 송치되었다. 이때 봉림대군을 만났고 의기투합하여 그를 따라 조선으로 와서 정착하였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중국 명나라의 전통을 잊지 않았다.
저자 왕덕구는 중국에서 이주해 온 지 수 백년이 지났지만 당시 함께 온 이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아울러 조선 사람들에게 명나라 후예로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당대에 조선인들이 명나라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박절함을 비판하면서 조선인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책은 처음 1818년에 편집, 제작되었는데 필사본으로 만들었으며, 이후에도 전사본 형태로 계승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옛 것을 번역해서 등사본(謄寫本) 형태로 배부하기도 했으니, 현재까지도 그들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황조인(皇朝人), 창경궁 밖(현 원남동) 거주
조선에 들어온 유민들은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던 인사들이다. 조선시대에 일본이나 중국 등 외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향화인(向化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교화시킨다는 것을 염두에 둔 용어이다. 반면에 명나라에서 온 유민들은 이들과 구분해서 특별히 ‘황제의 나라 사람’이란 의미의 ‘황조인(皇朝人)’이라고 불러주었다. 이처럼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고 아울러 그들에게는 각별한 예우가 뒤따르게 했다.
이들은 귀국 직후 임금이 창경궁 밖(현 원남동) 저택을 하사하여 이곳에 살게 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나라에서 내려주는 내탕금(內帑金)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자손들이 많아지면서 한계에 이르게 되어 뒤에는 한강 상류지방으로 이주하여 어로와 농사로 생계를 이었다. 또 일부 후손들은 정부의 우대정책에 따라 훈련도감 등에 무관직으로 들어가기도 했으며, 소수이지만 지방의 수령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작성자 : 김문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