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익원종공신녹권_임어을운의 이야기
- 유물명 좌익원종공신녹권_임어을운의 이야기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45656 좌익원종공신녹권(佐翼原從功臣錄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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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원종공신녹권에 대하여_
좌익원종공신녹권(서4565)은 조선시대 왕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임금인 세종의 아들 세조와 관련된 유물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세조는 조카인 단종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세조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나 세조는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왕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희생, 즉 피가 필요했는데, 계유정난과 단종의 유배와 죽음이 그것이다. 결국 왕이 된 세조는 즉위(1455년)한 직후, 자신이 왕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좌익공신이라 하였다. 좌익공신은 세조 집권의 주역이랄 수 있는 세 사람 권람,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총 4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공신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 즉 그 무게감이나 기여도, 필요성 등이 정공신(正功臣)보다 덜한 신하들을 따로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하였는데, 좌익원종공신이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을 1, 2, 3등으로 나눈 명단과 각 등급에 따라 부여받은 특전을 기록한 것이 이 좌익원종공신녹권이다. 실록 기사에 따르면 세조대에 좌익원종공신은 세조 즉위년 12월의 1차 책정 이후, 총 6차에 걸쳐 2673명이 선정되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좌익원종공신녹권에는 세조 3(1457)년 8월 12일에 추가된 분량까지 포함해 2356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특히 이 좌익원종공신녹권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초기 원종공신녹권 중 첫 선장(제본의 형식이 책등을 실로 묶은 형태)본이라는 점과 세조 4(1458)년에 초주갑인자로 찍어낸 금속활자본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다.
좌익원종공신녹권과 임어을운_
원종공신녹권은 자료 그 자체만을 본다면, 크게 재미있는 내용이라 할 수 없다. 2천명이 넘는 인물들의 직함과 이름을 각 등급(1·2·3)별로 죽 열기한 명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내 눈에 들어온 한 인물, 임어을운(林於乙云, 林於乙云伊). 그의 이야기가 이 녹권의 행간에 숨어 있다. 임어을운은 뒤에 임운(林芸)이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실록에는 세조의 가동(家僮) 또는 노(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어을운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김종서가 (세조가 건넨)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위 실록 기사처럼 임어을운은, 세조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이었던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김종서를 내리쳤던 장본인이다. 인터넷이나 드라마 등 이런 저런 곳에는 임어을운을 호위무사니 뭐니 하고 표현한 것도 더러 있지만, 임어을운은 세조의 노(奴)였다. 가동이라고도 했던 것을 보면 당시 아직 성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임어을운의 이름이 녹권 안에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임어을운이(林於乙云伊)를 1등 원종공신에 녹한다는 기사이고, 다른 것은 녹권 말미에 세조 5(1459)년 7월 15일 도승지 윤자운이 호군(護軍) 임어을운(林於乙云)을 임운(林芸)으로 개명하라는 세조의 전지를 경봉(敬奉)하였다는 기록이다. 어찌 보면 임어을운이야말로 권람이나 한명회, 신숙주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세조가 즉위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임어을운은 정공신이 될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노였던 그의 신분 탓이었으리라.
임어을운과 임운의 사이_
김종서를 도모하고 난 후, 임어을운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따랐다. 그것은 대체로 경제적인 부분으로, 실록 기사를 보면 세조(당시 수양대군)는 임어을운에게 면포 1백 필과 가사(家舍) 1구(區)를 내려 주게 했다. 이어 황보인(皇甫仁)의 새 집과 역시 반대 세력이었던 이승로의 김제에 있는 전토 역시 어을운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임어을운은 노, 곧 천인(賤人)이었을 뿐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은 숙명이었다. 그러나 임어을운은 이 숙명을 극복하고 임운이 되었다. 그 증거가 바로 원종공신녹권이다. 원종공신 각 등(等)의 공사천인(公私賤人)을 면천(免賤)한다는 공신 특전으로 임어을운은 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운은 과거의 임어을운이 아니었다. 그 증거가 그의 개명한 이름 임운이다. 임운은 더 이상 가동도 노도 아니었다. 부사직, 사직, 호군의 직함을 띤 어엿한 관직자, 양반이 되었다.
원종공신이 된 이후 임운은 어떻게 살았을까. 실록 기사를 보면 임운은 세조 13년 여진인 이만주의 건주위를 정벌하는 북정에도 참여하였고, 남이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강순과 관련된 고변을 상주하는데 관여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성종 9(1478)년에는 유자광이 모반하였다고 계달하였는데, 이 고변은 억측한 것이라 하여 임운에게는 장(杖) 1백 대에 유(流) 3천 리 및 고신(告身)을 모두 추탈(追奪)하고 역(役) 3년을 더하라는 벌이 내려졌다. 이 기록이 임운에 대한 마지막 실록 기사이다.
임어을운이 임운이 되기까지, 임운이라는 이름은 ‘그저 주어진’ 행운에 불과했을까? 임어을운은 주인인 세조의 뒤에서 손에 쥐어진 철퇴를 그저 내리쳤을 뿐일까?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임운(林芸)이 사관(史官) 김유(金紐)에게 말하기를 …
"예전에 세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신(어을운)이 꿈에, 태조(太祖)께서 세조께 금인(金印)을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전가(傳家)의 보물인데 이제 너에게 천명(天命)이 있으므로, 와서 주는 것이다.’ 하시니, 세조께서 굳이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드디어 받고서 절하시는 것을 보고, 이튿날 세조께 그 꿈 이야기를 아뢰었더니 세조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런 말을 내느냐? 다시 그 꿈 이야기를 말하면 죽이리라.’ 하셨다. … 김유가 임금께 갖추 아뢰었다.
어쩌면 세조의 뒤가 아니라 앞에 임어을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임어을운은 그 철퇴를 그저 내리친 것이 아니었다. 임어을운과 임운이 사이에는 숙명을 벗어나고자 노력한 한 인물의 뚜렷한 발자국과 열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