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유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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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천도와 도성 축조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개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94년에 한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천도한 이듬해 정궁인 경복궁을 완성하였고, 1396년 1월에는 한양을 둘러싼 도성의 축조를 시작하였다. 그해 9월에 이르러 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이 완성되면서 왕경 한양의 외형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도성의 서북방인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 골짜기에는 사소문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이 세워졌다. 창의문은 양주, 고양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였으나 축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풍수설의 영향으로 폐쇄되고 만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누르는 형국이라고 하여 사람들을 다닐 수 없게 한 것이었다. 이후로 오랫동안 인적이 끊겼던 창의문은 중종 때에 들어서야 다시 통행이 가능해졌다.

 

 

창의문에 새겨진 역사

 

본래 외적을 막기 위해 지은 한양도성의 창의문이었지만, 이 문을 부수고 도성을 침입한 것은 인조반정을 일으킨 조선의 군사들이었다. 1623년 3월, 광해군의 패륜과 외교정책에 반발한 반정군이 도성 서쪽 홍제원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반정을 모의하고, 12일 밤 닫혀있던 창의문을 열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켰다. 반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신 중 한 명이었던 이괄이 다시 난을 일으켰고, 이후 두 번의 호란까지 이어지며 어지러운 시절이 계속되었다.

 

인조반정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1742년, 영조는 창의문의 개축을 명하였다. 이 때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창의문의 문루가 새로 지어졌다. 문루 안에는 반정에서 공을 세운 정사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렸다. 당시 만들어진 문루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다.

 

            

 

두 개의 창의문도

 

영조대의 창의문을 그린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된 《장동팔경첩》의 <창의문도>이다. 정선이 그린 <창의문도>에는 새로 지어진 문루가 그려져 있어 1742년 이후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은 겸재 정선이 그린 또 다른 <창의문도>를 소장하게 되었다. 이 그림은 도성 안에서 창의문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의문도>와 유사한 구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근경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 속의 창의문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달리 문루가 없으므로 1742년 이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선은 52세가 되던 1727년에 인왕산 동쪽 기슭으로 이사하여 인곡정사를 짓고는 이후 32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는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창의문도>는 정선이 살았던 옥인동과 북악산 사이에서 창의문의 안쪽을 바라보고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위로 부침바위가 얹힌 성 밖의 인왕산 벽련봉을 두고, 가운데 창의문으로부터 남쪽으로 연결된 한양도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도성의 선을 따라 성 안의 송림이 배치되어 있고, 크고 작은 바위들 사이로 고갯길이 이어져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창의문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창의문도>는 수 년에서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구도의 창의문을 그린 작품이다. 정선의 두 <창의문도>에는 한양도성 창의문 위에 쌓여간 역사가 담겨 있고, 인곡정사에서 자적하던 정선의 시선이 담겨 있다. 두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도 수백 년 전 정선의 눈으로 창의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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