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의 얼굴 <이기양 초상화 초본>
- 유물명 재상의 얼굴 <이기양 초상화 초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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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의 초상화
이 그림은 이기양의 초상화 초본이다. 그림의 우측에 ‘복암공화상초본(茯菴公畵像草本)’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복암 이기양의 초상화임을 알 수 있다. 이 초상화는 완성품인 정본이 아니라 초본이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처음부터 하나의 그림을 그려 완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초본을 거쳐 완성품인 정본을 제작하였다. 이 그림도 이기양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만든 초본의 하나로서, 사모의 문양이나 관복이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본이라 할지라도 얼굴 묘사는 정본과 다를 바 없이 매우 세밀하다.
채제공의 후계자
몇 년 전 관상이라는 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었다. 조선 초기 세조(世祖)의 집권 과정을 관상이라는 소재를 통해 살펴본 흥미로운 내용의 영화였다. 물론 영화의 내용은 허구이지만, 조선시대에 관상이 유행하였고 인물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관원의 인사와 관련하여 외모가 고려되는 경우가 종종 확인되는데, 이 그림의 주인공인 이기양에게도 그러한 일화가 있다.
이기양은 선조(宣祖) 때의 명신인 이덕형의 7대손이었다. 명문가의 후손이었으나 오랫동안 과거 급제자가 끊겨 집안 형편이 한미했다. 나이 서른이 넘은 1774년에 진사시 장원으로 합격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관직을 그만 둔 후에는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그에게 갑작스러운 기회가 찾아온 것은 나이 오십이 넘어서였다.
1794년 3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에서 참배를 마친 정조는 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성균관에 들렀다. 정조는 종종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열어 우수한 자에게 상을 내렸는데, 이 날 성균관을 향한 것도 유생들에게 시험을 열기 위한 것이었다. 왕의 갑작스러운 행차에 성균관에 모인 유생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자 성균관 유생 외에도 경모궁 인근에 사는 선비들을 불러 모아 함께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당시 이기양은 별다른 벼슬 없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우연히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이는 이미 적지 않았으나 진사시 장원을 차지했던 그의 문장 실력은 정조의 눈에 들기 충분했다. 이기양은 시험에서 비교적 좋은 성적을 받고, 며칠 후 다른 유생들과 함께 궁에 들어가 정조를 대면하게 되었다. 유생들과 한명씩 이야기를 나누던 정조는 이기양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용모가 매우 좋다. 영부사 채제공을 제외하면 최고라 할만하다.
채제공은 당대를 대표하는 재상으로서,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채제공에 버금간다고 말한 것은 정조가 이기양의 관상을 극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정조 외에도 이기양의 외모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가 있는데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이기양은 평소 정약용 형제와 친분이 깊었기에, 그가 죽은 후 정약용이 직접 이기양의 묘지명을 지어 남겼다. 정약용이 묘지명 속에 표현한 이기양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공(이기양)은 체격이 우람하고 빼어났다.
이마는 둥글고 튀어나왔으며, 얼굴은 훤하게 넓고,
코·입·광대뼈·뺨이 모두 우뚝하고 풍만하였다.
키는 8척에 살빛은 희고 훤칠하였으나 수염은 적었다.
정약용 역시 매우 긍정적으로 이기양의 외모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기양의 초상화를 함께 살펴보면, 과연 얼굴 골격이 크고 눈에 비해 유난히 큰 코와 입이 눈에 띈다. 낯빛이 밝고 수염이 성근 것 또한 정약용의 묘사와 다름이 없다. 이기양의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정조나 정약용이 그 용모를 호평한 것이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훌륭한 관상 때문이었는지, 성균관 시험 이후 이기양은 곧 한성판관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진산현감이 되었다. 다시 1795년에는 춘당대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2인, 즉 전체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때 정조는 체제공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경(채제공)은 이제 늙었는데 경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다가
이기양을 얻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앞서 이기양의 용모를 채제공에 비견하였다가, 이제 또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재라고 하였으니 이기양에 대한 정조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이기양은 이후 사헌부 헌납, 승정원 승지, 의주부윤, 사헌부 대사간, 호조참판, 한성우윤에 이르기까지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열린 벼슬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800년 6월 정조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면서 조정의 정치구도는 급격하게 개편되었다. 정조 치세에 성장했던 남인(南人)들의 상당수가 신유년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채제공의 뒤를 이을 것이라 했던 이기양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총억이 천주교 신자였고, 이기양도 서학을 접한 것으로 의심되어 결국 함경도 벽지인 단천으로 유배된 것이다.
본래 건강치 못했던 이기양은 벽지에 유배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기양은 이렇게 뜻을 다 펴기도 전에 정쟁 속에서 희생되었고, 정조의 개혁정치도 막을 내렸다. 역사의 가정이란 의미 없는 것이지만, 정조의 시대가 좀 더 이어졌다면, 그 때 정조의 옆에는 재상 이기양이 함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