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문인들의 모임 속 '투호', 김두열의 〈투호아집도〉
- 유물명 조선 문인들의 모임 속 '투호', 김두열의 〈투호아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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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가을의 어느 날, 한양 서쪽 산자락 아래로 일곱 명의 젊은 문인들이 모였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색이 엷게 풀어놓은 먹빛처럼 변할 때까지, 그들은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투호(投壺)를 즐겼다. 모임에 참석한 예원(藝園) 김두열(金斗烈, 1735~1781)은 이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여섯 명이 각각 두 편씩 지은 시를 예서와 전서로 옮겨 적었다. 또 일찍 귀가했던 한 명의 시를 받아 첨부한 뒤, 김두열의 집안 삼촌인 배와(坯窩)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의 발문을 함께 실었다. 이렇게 한 권의 두루마리인 〈투호아집도(投壺雅集圖)〉가 만들어졌다.
예의(禮儀)와 오락(娛樂)의 놀이, 투호
투호아집(投壺雅集). 말 그대로 투호를 즐긴 문인들의 모임이다. 투호는 화살을 던져 병에 넣는 놀이를 말한다. 『예기(禮記)』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유교적인 이 놀이는 문인들 사이에서 매우 유행하였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수입되었고, 고려 시대에 전해진 사마광의 『투호신격(投壺新格)』을 통해 중정(中正)의 바탕이 되는 예의(禮儀)의 놀이로 행해지기 시작했다. 예의적 성격의 투호 놀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왕실뿐 아니라 서원과 향교에서도 권장되었다. 양반 사대부들은 심신 수양과 덕성 함양의 좋은 수단으로써 투호를 즐겼다. 조선 후기에는 박태보(朴泰輔)와 송준길(宋浚吉)처럼 『투호신격』에서 벗어나 새로운 투호 규칙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특히 투호회(投壺會)를 결성한 이만수(李晩秀)는 명대 소설 『금병매(金甁梅)』에 나오는 투호격에서 영감을 받아 병에 꽂힌 화살의 형세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고, 투호가 끝날 때마다 시를 짓는 규칙을 만들어 시를 짓지 못하면 점수를 깎거나 계산하지 않는 놀이 방법을 고안했다. 또 유만주(兪晩柱)는 ‘이기면 진실로 기뻐할 만하지만 져도 즐거웠다’라고 말할 정도로 투호를 좋아했고, 여름을 즐기기 위해서는 북영(北營)에 있는 몽답정(夢踏亭)에서 투호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다.
조선의 투호 문화는 몇 점의 그림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투호도〉와 김준근의 〈투호도〉(독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는 양반 사대부들이 투호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신윤복의 〈임하투호(林下投壺)〉(간송미술관 소장)는 양반뿐 아니라 기생이 투호를 하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실제로 18세기 초가 되면 쌍륙(雙六)과 투호를 즐기는 여인들이 많아졌는데, 김시빈(金始鑌, 1684~1729)의 「투호」 시에는 투호에서 입신의 경지에 오른 함경도 명원의 12세 소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비록 투호가 점차 단순한 오락물로 전락하여 쌍륙, 골패(骨牌), 투전(鬪牋) 등과 함께 도박성 게임이 되어 향락적 여가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양반 사대부들의 모임에서 시화(詩畵)와 함께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놀이였다. 김두열의 〈투호아집도〉는 이 같은 조선 문인들의 모임 속 ‘투호’의 문화를 보여주는 전통의 산물(産物)이다.
투호아집(投壺雅集), 그날의 모습
투호하고 잔에 술 따르고 시 짓는데, 온 골짜기 단풍 숲 해 질 녘 풍경이 기묘하다네.
한 폭에 본래 그대로의 참모습 옮겼으니, 서쪽 성의 정자는 가을을 맞이하였구나.
회숙(晦叔)의 시는 그림 속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잡목이 우거진 고즈넉한 공간에서 모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다. 작은 소반을 중심으로 여섯 명의 젊은 문인들이 앉아있고, 이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한 명의 문인이 투호를 즐기고 있다.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은 김두열, 이병모(李秉模, 1742~1806), 정창조(鄭昌朝, 1733~?), 홍상간(洪相簡, 1745~1777), 그리고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자(字)만 밝혀진 계인(季仁), 자건(子建), 회숙을 합하여 모두 일곱 명이었다. 작은 소반 위에 한 권의 서책이 있고, 그 옆에 놓인 원형의 기물에는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와 붓 한 자루가 담겨있다. 소반을 마주하고 무릎 위로 긴 두루마리를 펼친 인물이 김두열이다. 어떤 인물은 두루마리를 바라보고, 또 어떤 인물은 술잔을 들고 시를 읊는 듯하다. 소반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인물들은 이들을 바라보며 모임을 즐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과 떨어진 곳에서 투호를 즐기는 인물도 있다. 인물이 응시하고 있는 곳에 놓인 투호용 호(壺)와 그 주위로 떨어진 투호용 화살(矢)을 수거하고 있는 시동(侍童)들의 모습을 보니, 이미 한 차례 투호 놀이가 끝난 모양이다. 투호용 호와 화살이 유독 크게 그려진 것을 보면, 모임에서 투호를 특히 강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투호가 당시 조선 문인들의 아집에서 품격있는 놀이로 행해진 정황을 보여준다.
자건이 남긴 시처럼, 그들은 멀리 도성의 건물 누각만 보일 정도로 산속 골짜기로 발을 옮겨 모임을 즐겼다. 늙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골짜기며 석양이 진 산속 풍경 속에서 이루어진 투호 모임은 아름다운 시적 감흥을 일으킬 정도로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그날의 감흥이 담긴 〈투호아집도〉를 보고 감회를 느끼며 추억에 잠기지 않았을까? 오늘날 기념사진과 같은 한 권의 두루마리는 그날의 기억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