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 新韓靑年
- 유물명 신한청년 新韓靑年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울역사51620
- 첨부
사진 확대보기
1919년 3월 1일 만세의 시작을 우리는 보통 ‘민족대표 33인’으로 기억하지만 그들보다 앞서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당의 활동이 있었고, 이들은 1920년 4월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반을 마련하는데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한청년(新韓靑年)』은 신한청년당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창간한 기관지이다.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숨은 주역,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이야기하면서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분위기 속에서 여운형을 대표로 장덕수, 조동호, 선우진 등이 중심이 되어 1918년 11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한 단체이다. 이들의 활동은 3․1 운동의 촉발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밑거름이 되었다. 여운형 등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종전 후 평화 정책인 ‘14개 조항’ 선전을 위해 상해에 파견된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김규식을 보내 조선 독립을 연설시키고자 했다.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 독립을 요구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지배에서 해방 되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회의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과 일본의 야만적 침략성을 폭로해야겠는데, 당신의 원조를 요청하는 바이다.”
- 여운형과 찰스 크레인의 대화 中 -
또한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중국 각지와 러시아, 일본 등으로 흩어져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만주와 노령, 간도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 내 독립운동 단체의 호응을 유도하고,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연해주의 기존 독립 운동세력의 협조를 요청했다. 일본에서는 2·8독립운동을 촉진하였으며, 국내에서는 3·1운동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천도교 및 대표 지도자를 접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4월 초에는 상해에 위치한 프랑스 조계지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임시정부 조직 업무에 착수했다. 그러자 이곳으로 신채호를 비롯하여 김구, 이광수, 이동녕, 이시영, 류자명 등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들었고 협의 끝에 1919년 4월 10일 경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정식 출범시켰으며, 5월에는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자 이를 체계화시켰다. 이처럼 신한청년당은 임시정부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임시정부의 정상적인 운영과 독립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도왔다.
기관지 『신한청년』
"우리는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 우리는 만중일심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만세만으로 독립이 되리잇가. …
우리에게는 확실히 국민적 생존이 존재합니다. … 국가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생명과 재산과 모든 것을 다 희생하는 용기가 있습니다. …
우리가 잡지를 발행하는 이유는 실로 이에 있습니다. 일반국민의 국민적 상식을 증진함에 있어 만일의 기여를 하려 함이외다.”
- 『신한청년』 창간사 中 -
『신한청년』은 현재 한문판 창간호, 국한문판 창간호 그리고 국한문판 제2권 1호 이렇게 3개의 판본이 남아 있다. 국한문 창간호의 책등에 ‘대한민국 원년 12월 1일 발행(매월 1회)’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월간잡지를 표방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 매월 발행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한문판 창간호이다. 한문판은 박은식과 이광수가 주필로 대한민국 2년인 1920년 3월 1일에 발행되었으며 한․중 연대와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 활동의 일환으로 발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박은식이 쓴 「창간사」를 비롯한 김가진, 이동휘, 안창호의 「축사」, 「조선독립선언서」와 3·1운동 당시 각 지역 및 단체들의 선언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일제에 의해 고통 받는 한국인의 침상을 소개하는 글이 주를 이루고 있다. 1개월간의 한인 사상자, 수원 제암리 사건, 왜인(倭人)의 만행 등이 지역별, 사례별로 실려 있으며 이를 보여주는 사진도 10장이 수록되었다. 이 외에 독립을 위한 각 대표들의 결의문과 청원서, 신한청년당 당헌(黨憲) 등도 소개하고 있다.
「조선독립선언서」, 『신한청년』 창간호, 11쪽
신한청년당의 지향을 보여주는 기관지 『신한청년』은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퍼져 나갔고 독립운동정신을 고취시켰으나 일제는 이를 불온서적으로 취급해 잡지를 소지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
“『신한청년』을 배포한 김옥련은 육개월.
용천군 양평 아소교(阿蘇敎) 조사(助事) 김옥련씨는 작년 2월경에 『신한청년』이라는 잡지를 배포한 자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 지청에서 심리 중이더니, 지난 달 십오일에 6개월의 징역을 판결 받았다더라...”
일제의 검열과 압박으로 지속적인 발행이 어려웠던 상황과 1922년 신한청년당의 해체로 인해 역사 속에 사라졌다. 그러나 『신한청년』은 3·1운동을 전후로 한 민족적 상황에 대한 기록과 사료를 비롯하여 독립에 대한 민족들의 뜨거운 열망과 의지들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현재 우리에게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유물로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