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유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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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을 지킨 군인들의 고된 일상

 

조선후기 수도 한양의 방위와 치안은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영이 담당하였다. 삼군영의 시작은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군대가 조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에 고전하자 이에 대한 대책 마련으로 1593년 훈련도감이 새롭게 창설된 것을 시작으로 인조 때인 1623년 후금과의 전쟁 등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대비하기 위해 어영청이 세워졌고, 1682년에는 한양의 수비 강화를 위해 금위영이 세워지면서 삼군영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18세기에 이르면 군인들이 한양의 거리를 메우고 있다고 할 정도로 군인은 한양을 지키는 군인들은 새로운 주민층을 형성하게 된다.

 

삼군영은 왕의 호위, 궁궐 수비, 도성 방어와 치안 유지 등 중앙 군영으로서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도성의 축성과 수리, 청계천의 토목 공사 등 도시를 유지하기 위한 일에도 동원되었고, 군영의 재정 확충을 위해 동전을 주조하는 일도 맡는 등 다양한 일을 맡아 하였다. 이러한 삼군영에는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장군들도 있었지만 무신록이나 족보에 이름 한 줄 남기지 않은 군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들의 한양 살이와 군대 생활은 상당히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게 되면 선배들을 위한 잔치를 열거나 돈을 내야 하는 일은 비일비재 하였다. 매달 치르는 무예 시험에서도 일정 수준의 성적을 받지 못하면 곤장을 맞았으나 이리저리 차출되는 업무로 인해 무예를 연습하기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적은 봉급으로 군인들은 시간을 쪼개 부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임백현 면신첩(林百鉉 免新帖)〉은 삼군영 군인의 고된 군대생활을 보여주는 자료 중 하나이다. 무관직 신입 관원인 임백현의 신고식을 끝내고 해당 관청의 선배들이 작성해준 면신첩으로 조선시대에는 일종의 신고식인 면신례를 마치고 이와 같은 면신첩을 받아야만 정식 관원으로 인정해주었다. 신입들은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면신례를 잘 견뎌야 했는데 면신례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투자(投刺) ➡ 침학(侵虐)과 희학(戲謔) ➡ 허참례(許參禮) ➡ 면신례(免新禮)

 

 ◦ 투자 : 자신의 신상을 적은 명함을 갖고, 밤에 선배들의 집에 인사하러 돌아다님

 ◦ 침학과 희학 : 글짓기, 종종걸음치기, 뛰어오르기, 바닥에서 몸을 뒤집으며 구르기,

                      기와 위에서 책상다리하기 등

 ◦ 허참례 : 선배 관원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식

 ◦ 면신례 : 선배 관원들에게 대접하는 예식으로 면신례를 끝내야 관원으로 인정,

               계첩을 만들어 나눠줌

 

 

 

[임백현 면신첩(林百鉉 免新帖)]

 

新鬼 鉉百林

惟爾不良之才 濫登華秩 姑爲

退斥 以澄淸班 納汚藏疾 體

天地之鴻量 赦罪宥過 法聖賢之

大度 流來古風 今不可廢 鵝黃, 竹葉, 龍頭, 鳳尾, 卽刻進呈

先進

 

 

신귀 현백임

생각해보건대 너는 별 볼일 없는 재주를 가지로 외람되게도

높고 고귀한 벼슬자리에 올랐다. 우선 청반을 깨끗이 해야 함에도 너를 받아들이고 허물을 감싸주는 것은

천지의 크고 무거운 것을 본받음이고,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은 성현의 큰 도량을 본받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흘러 내려온 옛 풍속이라 지금 폐함이 불가하다. 아황(鵝黃, 아황주), 죽엽(竹葉, 담배), 용두(龍頭, 돼지고기), 봉미(鳳尾, 닭고기)를 즉시 올리라.

선배들이 씀

 

문서는 ‘신귀 현백임(新鬼 鉉百林)’이라고 시작하는데 이를 거꾸로 읽으면 ‘임백현 귀신(林百鉉 鬼新)’이 된다. 이렇게 성과 이름을 뒤집어서 쓰는 것은 새로 부임한 후배를 조롱하는 의미였다. 삼군영 중 하나인 훈련도감과 관련한 각종 공문서와 조정의 논의 사항, 훈련도감의 운영 모습을 정리한 『훈군등록(訓局謄錄)』에는 어느 신참 무예별감(武藝別監)이 면신례로 자살한 사건이 보고되었을 정도로 면신례의 폐단은 심각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면신례를 금단하고자 노력했지만 쉽게 시정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된 군대 생활을 참지 못하고 탈영하는 경우도 발행하였다. 〈훈련도감 수본문서(訓鍊都監 手本文書)〉는 훈련도감 군인 유대복(劉大福)이 도망간 사건을 보고한 문서이다. 아래 내용에 따르면 한양에서 유대복이 갈만한 곳을 사방으로 흩어져 찾아도 행적이 보이지 않자, 고향인 보령으로 도망간 것으로 짐작하고 해당 관아에 공문을 보내어 탈영병을 잡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훈국등록 수본문서(訓鍊都監 手本文書)]

 

吹皷手次知手本

右手本爲管下軍逃亡是在, 劉大福亦, 乙酉式保寧陞戶軍物點考闕到手本題辭據, 該旗隊摠等處, 不多日內, 期於捉納之意, 累次嚴飭定日矣. 京內可去之處, 四散搜覓是乎矣, 永無形跡是如爲有去乙, 不多日內, 期於捉納之意, 更爲嚴飭定日爲乎旀, 陞戶軍之逃亡, 此必是逃還本土是如乎, 該邑良中, 嚴明發關何如爲乎乙喩, 參商處分爲只爲.右手本.大將所.

道光十年正月 日, 知彀官朴.

嚴加督現爲旀, 其代段, 姑先塡代向事.

十八日.

大將(署押)

中軍

 

취고수 차지수본

위 문서를 보고하는 것은 관하군(管下軍)으로 도망한 유대복(劉大福)이 을유식 보령의 승호군물(陞戶軍物)의 점고(點考)에서 빠진 것을 도부(到付)한 수본의 제사(題辭)에 근거한 것입니다. 해당 기대총(旗隊摠) 등에게 빠른 시일 내에 잡아들이라는 뜻으로 여러 차례 엄하게 신칙하여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서울에서 갈 만한 곳을 사방으로 흩어져 찾았어도 끝내 자취가 없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잡아들일 것을 기약하라는 뜻으로 다시 엄하고 신칙하여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필시 고향으로 도망하여 돌아갔으니 해당 읍에 엄하고 분명하게 關文을 보내어 처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대장소(大將所)에 수본을 보냅니다.

도광(道光) 10년(1830) 정월 일에 지구관(知彀官) 박(朴)

엄하게 독려하여 나타나도록 하며 그 대신은 우선 먼저 채워서 대신할 일이다.

18일

대장

중군

 

 

군영에서는 도망병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어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훈련도감의 규정집인 『훈국사례촬요(訓局事例撮要)』에는 도망병에 대한 여러 사례들을 기재해 두었는데, 가령 1629년 군마를 가지고 도망갔다 체포된 훈련도감의 마병 이응선(李應善)은 효시형에 처해졌다. 시기마다 다르지만 도망병에 대해서는 초범인 경우에는 곤장 50대, 재범은 효시형에 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군영 관련 문서를 통해 조선시대 한양을 지켰던 군인들의 고된 군대 생활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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