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직 태극성표 광목
- 유물명 경성방직 태극성표 광목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기7295 (신승동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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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주름잡은 광목, 태극성(太極星)
광목(廣木)은 그 이름처럼 폭을 넓게 짠 피륙이다. 기존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옷감의 너비가 대략 30㎝ 정도였는데, 일제강점기 때에 나온 광목은 무려 96㎝(38인치)이니 종전보다 세 배나 넓은 것이다. 이런 포목이라면 옷을 만들 때에 종전의 좁은 피륙보다는 훨씬 수월했음은 물론이다. 원료는 목화솜이다. 그걸로 근대적인 방적기(紡績機)에서 무명실을 자아내고 그 실을 가지고 방직기(紡織機)로 피륙을 짜내면 광목이 된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옷감은 베(布), 무명(木), 모시(苧), 비단(絹)인데 이중에서 광목은 무명에 해당한다. 이 광목이 방직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해당 시기의 옷감을 대표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베나 모시 같은 천은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본래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근대적인 공업화가 추진되었을 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방직기계를 이용한 섬유산업이 선두에 나섰다. 이는 일본이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바로 방직기를 이용하여 광목을 직조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광목으로 바지저고리, 치마저고리, 두루마기 등의 옷을 해 입었는데 이불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도 역시 광목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일본인들은 일찌감치 조선 땅에 방직공장을 세워서 광목을 공급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질세라 조선인도 ‘경성방직’과 같은 회사를 차렸다.
영등포역 앞의 경성방직, [대경성부대관](1936)
경성방직의 광목, '태극성(太極星)'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는 미쓰이(三井) 그룹 계열사인 조선방직과 같은 일본인 공장들이 주로 광목을 생산, 판매하였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경성방직은 거대한 일본 기업에 도전하는 거의 유일한 조선인 기업이었다. 이 회사의 ‘태극성’표 광목은 경성방직이 영등포 역전에 공장을 신축하고 1923년에 방직기를 시운전하면서 처음으로 만든 상표였다. 여기에는 광목에다가 태극 문양을 넣고 그 주변에 8개의 별을 수놓았다. 태극은 우리민족을 상징하였고, 주변의 별 8개는 조선팔도를 염두에 둔 표식이었다. 바로 조선인이 만든 상품임을 적극 홍보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당시 경성방직에서는 처음으로 광목을 생산할 수 있게 된 만큼 기존의 일본 공장의 제품보다는 다소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창안한 것이 바로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길이었다. 태극성은 생산되자마자 바로 신문에 적극적으로 광고를 냈다.
신문 광고에는 한복을 입은 조선여인이 이 태극문양의 포목을 펼쳐 보이면서 “우리 손으로 맨든 광목”, “조선사람 조선광목”,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라는 구호들로 온통 민족성을 자극하는 문구로 가득 채웠다. 또 “값싸고 질긴 광목 태극성 광목”, “조선서 일등 광목 태극성 광목”이란 문구의 광고도 있고, “이천만 우리동포는 사랑하라! 입으라!” 등도 있었다. 대개의 광고 문구의 키워드는 우리, 조선, 동포, 민족 등으로 장식하였다
우리박물관 소장 <경성방직 태극성표 광목>(서기7295, 신승동 기증)은 기증자의 부친이 소방관 간부로 재직할 때인 1950~60년대에 경성방직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유물 자체로 보더라도 ‘태극성’이라는 글자가 현대적 맞춤법에 맞게 정교하게 써져 있는 점, 광목의 치수를 인치로 기록했다는 점 등으로 보아 해당 시기의 제품으로 여겨진다. 크기는 35인치, 40야드라고 했으니 우리식으로 폭은 88.9㎝에 길이 36.5m가 된다. 이 유물은 전체 피륙에서 잘라 쓰고 남은 잔여분으로 길이 230㎝이다. 경성방직은 태극성(太極星) 이외에도 쌍연(雙燕), 불로초(不老草), 천도(天桃), 해타면사(海駝綿糸)라는 상표의 제품을 생산했다. 이중 우리박물관에서는 '경성방직 쌍연표 광목(서기13712, 서기13713, 고중덕 기증)' 두 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제품의 크기는 38인치, 40야드로 표기되어 있고, ‘영등포공장’이라는 제작처가 들어가 있다. 또한 당목(唐木)이라는 제품명을 표기했는데 이 역시 광목으로 비교적 가는 실로 곱게 짠 것을 말한다.
경성방직 태극성 상표 경성방직 쌍연표 광목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의 밀물을 타고…
1920년대에 조선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국산품 애용, 소비 절약, 자급자족, 민족기업의 육성 등을 표방하는 ‘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인해 경성방직과 같은 기업은 상당한 호기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생활필수품인 직물과 같은 제품에서 직접적인 효과를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경성방직의 신문광고 문구들은 다분히 이러한 운동의 과실을 얻으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경성방직은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조선방직, 도요방적, 가네가후지방적과 함께 조선 내 4대 방직회사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제국이 만주와 화북지방으로 그 세력권을 확대해 나아갔는데 경성방직도 제국을 따라 북방으로 올라갔다. 1939년에는 펑텐(奉天, 지금의 瀋陽)에 계열사인 남만방적(주)을 설립하면서 그 사세를 확장해나갔던 것이다.
1950~60년대, 물가를 반영하는 대표상품이 되다
광목 태극성은 광복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60년대에 태극성의 가격은 곡물류 등과 함께 물가의 척도를 알려주는 지표로도 활용되었다. 1950년대에 일간신문에서는 ‘상황(商況)’이라는 제목으로 상거래 현황과 물가 동향을 간략히 알려주곤 했는데 이때 일상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품목으로 곡물류와 함께 면직물의 가격을 소개했다. 당시 ‘태극성’표 광목은 동일방직의 백두산과 함께 자주 소개되었다. 1957년 7월 1일 경향신문 ‘상황(商況)’에서는 상거래가 저조하다고 하면서 백미는 가마니당 2만 400환이고, 직물류로는 태극성이 필당 5천 300환이라고 했다. 7월 8일에는 백미는 가마니당 2만환, 태극성은 5천 100환이라고 했다. 이어 같은 신문 1961년 2월 5일 기사에서는 태극성이 8천 505십환이라고 했으니 물가 앙등이 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태극성은 이후로 1972년까지도 필당 가격이 간혹 소개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 광목이 실생활에 애용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경성방직
김성수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고, 동생 김연수는 쿄토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경제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전북 고창 출신으로 호남의 거부집 자제이다. 경성방직은 이런 김성수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전국각지의 주주들이 투자한 주식회사로서 호남뿐만 아니라 영남의 지주들, 서울의 자본가들도 참여하여 이룩한 회사이다. 대표적으로 경주의 최부자집 최준(號: 汶坡)도 창립 발기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런 분들에 힘입어서 1919년 10월에 창립총회를 열 수 있었다. 1920년에는 영등포 역전에 5천여 평의 땅을 사들여 공장을 건설하고 1923년에 시운전을 하게 되었다. 공장을 가동하면서 이후로는 전적으로 동생 김연수에 의해 운영되었다.
경성방직은 일제 때 조선인이 운영하는 산업체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처음 1923년에는 방직기 100대를 마련하여 시작하였고 1933년에는 자동 방직기를 672대로 증설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영등포 공장부지 내에 직물을 짜는 방직공장 이외에 목화에서 실을 자아내는 방적(紡績)공장을 지었다. 공사가 시작되면서 직기(織機) 224대와 함께 방기(紡機) 2만 1천 6백추를 새로 들여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즈음 춘원 이광수는 조선일보의 ‘실업과 정신수양’(1935.4.5.)이라는 기고문에서 ‘…경성방직의 확장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의 척후(斥候)임이 확실하다’고 했다. 바로 척후에 뒤이어 대군이 밀려온다는 의미로 뒷날 한국의 기업성장과 경제발전을 예시하는 문구인 것이다.
그런데 일제의 성장과 함께 발전하던 경성방직은 그들의 패망과 함께 점차 쇠락하였다. 이후로는 여타 큰 기업의 성장에 묻혀서 사람들에게는 그 옛날의 기업으로만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기업사에 좀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이 회사는 1970년에 ‘(주)경방’이란 사명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
(작성자 : 김문택 학예연구사)
<참고자료>
박상하, 《한국기업성장 100년사》, 경영자료사, 2013
김용삼,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정신》, 프리이코노미스쿨, 2015
매일경제, ‘산업인맥 32~35, 방직업 1~4, 경성방직’(1973.04.19.~26.)
조선일보, ‘실업과 정신수양’(1935.4.5.) ‘商況’(1957.7.1.~196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