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 초상
- 유물명 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 초상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기8316, 서기8317, 서기8324, 서기8326, 서기8352, 서기8379, 서기8380, 서기8410, 서기8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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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물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딜쿠샤의 안주인이었던 메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 1889년 ~ 1982년)는 드로잉, 수채화, 유화, 인물화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남겼다. 메리는 결혼 전에는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지인들과 연극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그린 그림의 주제는 함께 생활했던 주변 인물, 여행 다녔던 곳의 자연 풍경 등이 주를 이룬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금강산을 비롯한 여행지, 테일러 가족이 운영하던 광산의 작업장 모습과 일상 등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초상화를 배경 없이 인물만을 그렸는데 사실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인물들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갓이나 조바위, 족두리 등을 쓰고 옷 또한 제대로 갖춰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사전에 준비를 하고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메리 테일러가 그린 인물화 중 현재 우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인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질감이 거친 황갈색 종이에 연필이나 콩테로 그린 것, 채색을 한 것,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 또는 인쇄물, 복제품을 액자로 꾸민 것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물화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메리가 그림을 전시하거나 판매할 때 작성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 설명서」와 그녀가 저술한 『호박목걸이』, 또 그녀의 아들인 브루스 티켈 테일러가 한국에서의 경험과 주변인들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은행나무 옆 딜쿠샤』를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초상화로 그려진 인물 몇 명을 소개하고자한다.
먼저 김주사는 본명이 김상언으로 메리의 기록에 의하면 1895년에 조선의 내각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1897년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워싱턴에 갔으며, 1905년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1897년에서 1903년 사이에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주미한국공사관의 견습으로 근무하다가 1906년 의정부 주사, 1907년 내각 서기랑, 1908년 내각 주사 등을 지냈다. 그는 30년가량 테일러 가족의 집안일과 사업을 도와주었던 사람으로 테일러 부부가 당시 한국의 상황과 문화, 풍습 등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1942년 테일러 부부가 미국으로 추방당한 후 일제에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집에서는 태극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공서방은 짧은 머리가 특징인 인물로 주로 집안일과 잔심부름을 해주었으며, 메리가 가택연금 중 그렸던 그림을 집 밖의 지인에게 전달했던 충직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림에 표현된 그의 표정에서 당시의 고단한 생활과 아픔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듯한 느낌과 함께 테일러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뒤 그는 무사했을 지가 궁금해진다.
〈김상언 초상〉
한서방은 양반으로 성공회 교인이었다. 메리와는 성공회 교회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던 것으로 보다. 그의 초상화는 세 가지 종류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황갈색의 거친 종이에 연필과 콩테를 사용해 갓을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탕건과 갓을 착용한 후 기름종이로 만든 갈모를 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채색을 한 것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 그림과 밑그림은 같으나 채색이 되지 않은 것을 액자로 꾸민 것이다. 그림에 나타난 그의 인상은 의연하면서도 온화하고 강직한 선비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서방 초상〉 〈한서방 초상〉
그 외에도 여성의 초상화로는 진주, 모란, 순지네와 함께 이씨, 조씨 등이 있다. 진주는 김상언의 가족으로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를 쓰고 있는 모습이며, 상류층 여성으로 한문과 서예, 음악과 가사 등을 다른 여성들에게 가르치던 이씨, 자신은 돌보지 않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순지네 등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그림은 여타의 인물화와는 다르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당시의 무용수였던 모란의 그림이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무용을 해왔다고 하는데 어깨와 가슴을 곧게 펴고 당당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대를 꿰뚫을 듯한 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녀는 당대 최고의 춤 실력을 자랑하는 이로서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에 보는 이를 압도한다.
〈진주 초상〉 〈순지네 초상〉 〈모란 초상〉
메리가 그린 이 초상화들은 1942년 일본에 의해 추방되기 전 가택연금 상태에서 그녀가 그려 비밀리에 집 밖에 있는 지인에게 전달하여 보관했던 것으로 광복 후 메리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림의 손상이 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인물화들을 미국으로 가져 가 전시회를 열거나 판매를 위해 여러 번 복제품을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과 함께 남아 있는 설명문에 의하면, 1950년에 바티칸 미술관(Vatican Art Gallery)에서 ‘Holy Year Missionary Exhibition’을 위해 그림의 원본을 구입하고, 전시를 했다고 한다. 또 초상화는 복제되어 한국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적십자사에 판매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에는 메리 테일러 이외에도 많은 서양인들이 한국의 생활과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나 그린 그림들이 많다. 그런 사진이나 그림들을 접할 때면 드는 의문점이 있다.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서양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 더 객관적인가?’, ‘사진이나 그림은 과연 당시의 모습을 진실 되게 담았을까?’, ‘작가의 의도대로 연출된 부분은 없었을까?’ 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사진이나 그림들은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서양인들의 상대적 우월감이 은근히 깔려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러한 자료를 접할 때에는 다각적인 접근과 함께 신중한 검증을 통해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메리 테일러가 그린 한국인의 표정이 모두 무표정함을 넘어 초연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혹시 메리는 이 인물화들을 그림으로써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사연 많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작성자 : 장은혜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