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 유물명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52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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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 여의도의 시범아파트와 한양아파트가 빠른 재건축 추진을 위한 서울시의 공공지원계획인 ‘신통기획’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두 곳은 모두 1970년대 ‘중산층’을 위해 대량 공급된 ‘단지형 아파트’로 우리나라에서 아파트가 대중적인 주거 형태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주택이다. 재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50여 년 간 여의도의 개발과 변화 속에 자리했던 이 주택들은 사라지고 조만간 새롭게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아파트는 한 건물 안에 독립된 여러 가구가 살 수 있도록 여러 층으로 지은 공동주택이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로마 ‘인술라(insula)’에 이르지만 지금의 아파트 형태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에게 공급되었던 임대주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아파트는 일제강점기 일본 공공기관과 기업에서 자국민을 위해 지었던 미쿠니아파트나 유림아파트 등이 초기 사례이다. 광복 후, 1950년대에 개명아파트와 종암아파트 등 민간아파트가 건축되기 시작하였지만 아파트 건축이 보다 활발하게 이뤄지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울로 몰려들었고 규격화된 아파트 건설은 단기간에 주택을 대량 공급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난방, 온수, 위생, 방범 등의 측면에서 아파트는 주거 환경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였고, ‘가족’ 단위의 독립적인 생활공간을 제공해주었다.
프랑스의 한 사회학자가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이라 했을 만큼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주거 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한옥 생활에 익숙했던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아파트는 아직 낯설었고 새로운 삶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아파트 주거에 대한 생각이 크게 변화하게 된 계기는 70년대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시민’과 ‘시범’ 아파트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먼저 ‘시민아파트’는 6.25 전쟁 이후 서울 시내 곳곳에 형성되었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불도저, 돌격시장으로 불리며 세운상가, 한강 여의도 개발 등 대규모 개발 사업을 이끌었던 김현옥 서울시장(재임 1966~1970)은 ‘아파트 주택은 서민 대중부터 먼저 해결’, ‘누워있는 판자촌을 아파트로 세우자’는 구호를 내걸고 저가의 시민아파트를 지어 서민을 입주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입주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서울시가 아파트 골조만 지어주고 벽체 등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담당하도록 계획하였다. 시민아파트 건설은 계획이 발표된 1969년 한 해에만 406동이 완공될 정도로 빠르게 추진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70년 4월, 부실 시공한 와우시민아파트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
좌)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식〉 (서 36511)
금화아파트는 1969년 서대문구 천연동 금화산에 지어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아파트이다.
사진은 준공식 장면으로 수많은 군중의 맨 앞줄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의 모습이 보인다.
우) 〈낙산지구 시민아파트 입주증〉 (서 52203)
1969년 4월 3일에 동대문구청장이 발급한 낙산지구 시민아파트 입주증이다.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고를 계기로 아파트 건설의 방향은 크게 바뀌게 된다. 비싸지만 보다 안전한,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의도 시범아파트이다.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 건설은 사실 1962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주택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마포아파트’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0층 높이, 중앙난방, 엘리베이터,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겠다던 최초 계획은 전력난과 자금 부족 등의 문제로 6층 높이의 연탄 개별난방으로 변경되고 엘리베이터 설치도 취소되었으나 “생활혁명을 가져오는 계기”라 평가할 만큼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주거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였다고 하는 마포아파트의 전경은 6.25 전쟁 이후 빠르게 발전하는 대한민국을 대외에 알리는 상징적 이미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좌) 〈마포아파트〉 (서기 7392)
마포아파트는 1962년 마포구 도화동, 옛 마포형무소 농장터에 지어졌다. Y자형 6동과 일자형 4동에 642가구가 입주한 ‘아파트 단지’로 설계되었고,
온돌 마루가 사라지고 서구식 입식 구조를 구현했다는 점이 혁신적이었다.
우) 〈마포아파트 전경〉 (서 50176)
FREE ASIA PREE에서 발행 『자유세계』(제15권 8호, 1967)의 「발전하는 한국의 새모습」이라는 글에 실린 마포아파트의 모습이다.
여기에 ‘부엌, 변소, 목욕탕 등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중류층을 위한’ 주거 시설로 소개되었다.
마포아파트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중앙난방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고층아파트는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준공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중산층 아파트를 표방한 시범아파트는 시민아파트와 다르게 30~60평의 당시로서는 중대형 평형으로도 지어졌고 선(先)분양제도를 통해 입주자가 건설비용을 모두 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제작된 분양안내서에는 이러한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분양안내서는 사업자가 분양하고자 하는 아파트를 광고하기 위해 작성한 자료이다. 분양안내서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아파트 선분양제도와 관련 있어 보인다. 선분양제도라는 것은 주택을 완공하기 이전에 소비자에게 우선 분양하고, 소비자에게 계약금, 중도금 등으로 주택 가격의 일부를 납부하도록 해 건설비용을 충당할 수 있게 한 제도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부분 (서울역사 52890)
「주택가격 및 납부구분」을 보면 입주자는 착공일(1970년 9월 25일) 한 달 전에 주택 가격의 약 1/10을 계약금으로 납부하고
이후 같은 금액을 2달에 한 번씩 총 6차례에 걸쳐 중도금 형식으로 납부하여 건설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시민아파트가 서울시에서 자금을 들여 건설한 뒤 입주자들이 낮은 이자로 오랜 기간에 걸쳐 상환하는 방식이었다면, 선분양제도는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입주자가 건설비용을 부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제도를 통해서는 소비자가 지어진 집을 직접 확인하고 분양받을 수 없었기에 실제 아파트 내부와 유사하게 지어 놓은 모델하우스(견본주택)이나 분양안내서를 통해 집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분양안내서에는 아파트의 지리적 위치, 주변의 자연 환경과 편의 시설, 교통과 같은 생활환경에 관한 정보를 비롯하여, 주택의 크기와 구조, 층수와 동수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또한 아파트 분양 주체와 방법, 준공예정일, 가격과 납부시기에 관한 안내도 있다. 이러한 건축적 측면에서의 객관적인 정보 외에도 분양안내서에는 해당 아파트에 거주함으로서 누리게 될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이 제시되어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부분 (서울역사 52890)
“더 많은 태양과 녹지와 공간이 있는 이 건강한 꿈의 주택단지가 서울의 맨하튼이 될 여의도 시범 아파트 단지에 첫 선을 보이게 됩니다.
격변하는 시대에 새로운 도시생활의 유토피어로서 직장과 주거지가 가까운 이상주거로서 서슴치 않고 시민여러분에게 권장하는 바입니다.
밝고 여유 있는 이 설계와 감리는 국내최고수준의 기술진에 의해 이루어지며 정밀한 시공을 보장키 위해 국내굴지의 건설 회사들이 등장 될 것입니다.”
“서울시가 계획하는 획기적인 여이도 개발사업의 일환!, 입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주택단지”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첫 장에 제시된 문구는 앞으로 건설할 이 아파트가 미래 발전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위치하며 고품질의 이상적 주거 공간이 될 것이라 소비자를 설득하고 있다. 사실 시범아파트는 1960년대 후반 한강개발에 의해 새롭게 생긴 매립지 위에 지어졌다. 당시 여의도는 본격적인 개발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공군비행장이 있는 서울 서남부의 변두리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세계 최고의 금융・상업・문화 중심지인 뉴욕 맨해튼 섬처럼 여의도가 “새 서울의 심장” 역할을 하는 지역으로 성장하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내 최고 수준의 기술진에 의해 건설된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분양안내서 뒷표지에 설계와 감리에 참여한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생긴 아파트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배치도와 조감도 (서울역사 52890)
조금은 막연하고 일반적인 성격의 이 문장들은 다음 장에서 아파트 배치도와 조감도 등 시각자료로 보다 구체화되었다. 탁 트인 한강을 배경으로 아파트 각 동은 남쪽을 향해 일자형의 동일한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널찍한 공간에는 녹지와 주차시설이 잘 조성되어 있는 모습이다. 주변 도로는 반듯하게 정비되고 사방과 통한다. 시각 이미지와 함께 “시청 앞까지 10~15분” 밖에 소요되지 않아 서울의 중심부와 가까울 뿐 아니라 주변에 국회의사당, 경찰서와 소방서, 중, 고등학교 등 주요 시설이 건설될 것이라는 추가적인 정보를 통해 소비자들은 이 “격조 높은 아파트”에서 누리게 될 깨끗하고 밝고 여유로운 생활을 상상하게 된다.
다음 장에는 평형 별 평면도, 주택가격과 납부방법, 공사기간 등에 대한 안내가 있다. 평면도를 통해서는 어떤 생활을 구현하려고 의도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먼저 시민아파트가 연탄아궁이 방식의 온돌난방을 했던 것과 차별하여, 온돌난방의 좌식생활에서 벗어나 입식으로 생활방식이 변화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에서는 일부 온돌방을 선택할 수 있게 하였지만 거실의 TV장과 소파, 탁자, 침실의 침대와 책상, 주방의 입식 싱크대와 식탁 등 실내에 그려진 모든 가구들이 입식생활을 위한 구성이다. 실내 공간 구획에서 가장 큰 변화는 안방이다. 즉 부부침실에 별도의 욕실과 드레스룸이 추가되면서 안방이 가족의 공동 공간이 아닌 부부의 개인적인 공간으로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거실과 주방이 연결되고 식사 공간을 별도로 계획한 것, 욕실과 화장실이 하나로 통합된 형태로 주택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도 이전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중산층 아파트 분양안내서에는 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입식생활이라는 서구의 현대적 생활 방식의 구현과 그것이 보편화되어 가던 시대적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안내서〉 48평형 평면도 (서울역사 52890)
<작성자 : 정지인 학예연구사>
[참고문헌]
진유라, 「1970년대 서울의 시범아파트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 석사학위논문, 2007
권이철, 「중산층 아파트의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 석사학위논문, 2016
서울역사박물관, 『아파트 인생』,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