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서명승도첩 關西名勝圖牒
- 유물명 관서명승도첩 關西名勝圖牒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2383
- 첨부
사진 확대보기
평안도의 명승이 여기 다 모여 있구나. 19세기 실경산수화 《관서명승도첩》
어디 한번 떠나 볼까?
1822년 3월, 홍문관 부교리 박래겸(朴來謙)이 43살의 나이로 암행어사의 임무를 맡고 평안도로 떠났다.
가족과 작별의 정도 나눌 틈 없이 한양을 떠나 평안도에 도착한 그는 평양, 강동, 성천, 안주 등 총 21개 고을을 돌았다. 출두한 고을에서는 그곳의 사정과 풍속·민심 등을 살폈고, 서북지역이라 차별을 받아온 그네들의 삶을 이해했다. 이후 느낀 소회를 『서수일기(西繡日記)』로 남겼다.
박래겸은 126일간 암행어사로서 동분서주했지만, 업무만 한 것은 아니다. 빠듯한 본연의 업무를 소화하면서도 평안도 곳곳의 명승을 방문하여 감회에 젖었다. 그는 도착한 고을에 명승이 있다면 피곤을 무릅쓰고라도 들러 보고자 했다. 연이은 이동과 업무로 지쳤던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이는 평안도가 가진 지역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평안도는 어떤 곳인가
평안도는 우리 역사에 있어 고조선의 수도, 고구려의 도읍, 고려의 두 번째 도시 ‘서경’이 있었던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예로부터 뛰어난 자연 풍광을 가진 곳으로도 유명했다. 즉 평안도는 유서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명산(名山)과 강을 벗 삼아 세워진 사찰, 누정, 유적지가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 요충지이자 중국과의 교류를 위한 곳으로 그 역할이 집중되었고, 중앙으로부터는 정치적 차별을 받은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러다 18세기, 중국과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평안도는 더 이상 국경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지역이 아닌 외교적 교류와 무역이 활발한 곳으로 변모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이전에는 평안도를 머나먼 변방의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여겼다면 이제는 바뀐 국제 정세에서 오는 안정감을 바탕으로 멋진 경치를 즐기고 싶은 선망의 대상지가 된 것이다.
하여 박래겸도 업무상 평안도로 오긴 했지만, 그간 들었던 이곳의 뛰어난 경치를 눈에 담지 않고는 안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글과 그림, 회화식 지도 제작으로 활발히 이어졌는데,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관서명승도첩》도 그러한 결과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명승지 독차지한 평안도 지방, 이번 걸음 그야말로 신선놀음일세.
묘향산 절간의 안개와 노을, 대동강에 배 띄우고 한 곡조 뽑으리라.
하는 일도 흥겨웁고 산수(山水)도 기가 막혀, 연소한 나이에 빼어난 풍채 돋보이리.
누가 동정할까 병든 유마힐(維摩詰)을, 날개 접고 방장실에 앉아 있나니.
- 장유(張維) 『계곡집(谿谷集)』 권27 -
평안도 곳곳의 명승을 담은 《관서명승도첩》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관서명승도첩》은 평안도의 실제 자연, 인문 경관을 담은 19세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 명승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그린 총 16폭의 화첩이다.
총 9개 고을 14개 명승을 지역에 따라 한 폭 또는 여러 폭으로 나눠 부감법(俯瞰法)을 적용하여 그렸다. 비단에 청록 채색으로 그려진 그림은 평안도 영변, 평양, 강동, 성천, 삼등, 은산, 안주, 강계, 의주를 대표하는 명소가 담겨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명소와 계절이 혼재되어 있어 유람 경로를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각 폭별로 살펴보면, 가장 많은 면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은 영변과 평양이다. 묘향산(1~3폭)을 그중 가장 많이 할애했으며, 그 일대인 어천(4폭)과 철옹성(5폭)이 이어진다. 다음은 대동강大同江의 능라도와 부벽루(6폭), 서강西江 동쪽 언덕 위 열파정(7폭), 성천십이봉과 성천 객사 내 강선루(8폭), 앵무주를 바라보는 황학루(9폭), 장선강(長鮮江) 절벽 위 담담정(10폭), 청천강 옆 안주성 장대 터의 백상루(11폭), 독로강(禿魯江) 옆 강계읍성 내 인풍루(12폭), 압록강(鴨綠江)을 바라보는 의주성 장대의 통군정(13폭), 능성강(能成江) 좌우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육육동(14폭), 평양성 일대의 연광정(15폭)과 선화당(16폭)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평안도에서 이곳을 빼고 논할 순 없지. 그 중에서도 “영변, 묘향산”
영변 소재의 실경은 《관서명승도첩》에서 첫 머리인 1폭~5폭까지 실려 있는데, 그 중 묘향산妙香山 일대가 가장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묘향산은 수많은 암자와 조선시대 3보 지위를 갖춘 대찰(大刹)인 보현사가 있던 곳이다. 영변 동쪽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기묘하고 신선들의 자취가 서려 있다’ 하여 묘향산이라 이름 불렸다.
험한 산세를 가졌지만 수려한 경관으로도 유명했는데 예로부터 8만 4천 봉이라 일러 오듯 여러 산줄기에서 생긴 봉우리와 골짜기, 기이한 바위와 깎아진 절벽, 맑은 폭포에서 흐르는 물소리, 그윽한 꽃향기에 취한 새소리가 산 전체에 퍼져 누구나 한 번쯤 다녀오고 싶은 경승지였다.
이러한 깊은 산 속에는 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묘향산은 영변대도호부의 동쪽 1백 30리에 있는데,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부른다. 옛 기록에 그 산에 360여 개의 암자가 있었다’라고 전한다. 무학대사를 비롯하여 서산대사 등 많은 승려가 이곳에 머물며 도를 닦았다. 특히 서산대사는 묘향산을 ‘장엄하고 수려하다’고 평하며, 조선 4대 명산(동쪽-금강산, 서쪽-구월산, 남쪽-지리산, 북쪽-묘향산)의 으뜸으로 손꼽았다.
지금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19세기 조선에선 유명했다오. 망각에서 기억으로 “삼등, 육육동”
예로부터 삼등에는 ‘황학루(黃鶴樓)’와 ‘육육동六六洞(일명, 36동천三十六洞天 : 골과 내로 둘러싸인 36개의 경치 좋은 곳)’이 유명했다. '황학루’는 지금도 많이 알려진 명승인데 비해, 육육동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당시 이곳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알려진 ‘핫 플레이스’였다.
능성강能成江의 좌우에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그 경치가 기이하고 볼만하여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던 것이다. 하지만 육육동에 대한 기록은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특히 그곳의 풍광을 자세히 그린 그림은 흔치 않기에 《관서명승도첩》14폭 장면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아야 할 이유다.
박래겸 역시, 삼등 땅에 도착하여 이곳을 방문하길 원했지만, 바쁜 업무로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하자 아쉬움에 전 향임(鄕任)이었던 주원(朱遠)을 불러 그곳에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황학루에 올라서 맑은 강을 굽어보니 앞으로는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있었으며 또한 매우 깨끗한 땅이었다. 여기에서 배로 6~7리를 가면 삼십육동천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참판 엄기(嚴耆)가 고을에 부임했을 때, 그윽하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서 처음으로 동洞의 이름을 지었다. 그 후로부터 왕래하는 천자의 사신들 중에 머물러 감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삼등 땅의 백성들은 “동천洞天을 구경하는 손님 접대가 힘들어서 심지어는 ‘동천이 천벌을 받은 뒤에야 백성들이 살 수가 있다’라고 할 정도입니다”라고 했다.
- 박래겸(朴來鎌) 『서수일기(西繡日記)』, 1822년 4월 2일 -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관서명승도첩》은 현전하는 관서명승도 중 가장 많은 양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관서팔경(關西八景)’으로 회자되는 명승을 포함하여, 19세기 평안도 곳곳의 명승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지도적 성격과 산수화적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고, 지형지물과 건물마다 해서체(楷書體)로 명칭이 표기되어 있어 현재 사라진 장소를 되짚어 볼 수도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평안도 땅을 밟고 그 경관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도 대조할 수도 없다. 하여 《관서명승도첩》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한 번쯤 가보고 싶은 선망의 대상지를 그려 놓은 선조가 남긴 귀한 선물인 것이다.
(작성자 : 송지현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