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상자에 담긴 일제강점기의 기념품
- 유물명 나무상자에 담긴 일제강점기의 기념품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3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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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모란당초문발(靑磁象嵌牡丹唐草紋鉢)〉
(서31547, 입지름 18.7, 굽지름 5.8, 높이7.1cm)
우리박물관은 근래에 나무상자에 담긴 청자나 나전칠기, 신선로 등 일제강점기에 상품으로 제작된 공예품들을 상당수 수집하였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청자상감모란당초문발(靑磁象嵌牡丹唐草紋鉢)〉(서31547)은 모란과 당초문을 상감기법으로 장식한 비색(翡色)의 그릇으로 언뜻 보기에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청자인 듯하다. 그런데 나무상자의 덮개에는 그릇의 쓰임새와 제작처를 알려주는 “菓子鉢 漢陽高麗燒(과자발 한양고려소)”라는 묵서와 한양고려소의 도장이 찍혀 있고 상품 안내서가 함께 들어있어서 이를 통해 이 그릇이 일제강점기 도자기 공장인 한양고려소(漢陽高麗燒)에서 고려청자를 모방하여 제작한 것이며 조선 토산품 상점인 우미이치상회(海市商會, 해시상회)에서 판매했던 상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서에는 “고려청자를 재현하기 위해 십수 년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한양고려소를 설립한 해인] 1912년 형상과 조각, 모양, 상감 등 옛 양식을 본뜰 수 있었고 1914년 도쿄다이쇼박람회에 출품하여 동상을 받았으며 궁내성(宮內省)에 납품할 수 있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당시 사업수완이 좋았던 일본 자본가들이 식민지 조선의 청자를 재현한 도자기를 상품으로 개발하고 이를 과자그릇이라는 자세한 용도까지 써넣어 판매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조선 토산품 판매의 원조 우미이치상회(海市商會)
일제강점기에 조선은 일본인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 정부가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의 자부심을 높이고 제국주의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으로의 여행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 토산품으로 인식되었던 근대 공예는 여행의 기념품이나 선물로 주목받게 된다. 일본인들이 ‘고려소(高麗燒)’, ‘미시마테(三島手)’라고 불렀던 재현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조선의 독특한 요리기로 소개되었던 ‘신선로’, 그리고 ‘나전칠기’ 등은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특히 정교한 제작 기법과 화려함, 천하제일 비색을 갖춘 조선을 대표하는 고미술품으로 재인식되었던 고려청자와 나전칠기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근대적 기술로 그 아름다움을 재현했다는 측면에서 상류층의 고급 소비품으로 향유되는 한편,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변용, 절충되어 상품으로 대량생산・유통되었다. 이와 같이 상품으로 제작된 근대 공예품을 판매하였던 상점으로는 이왕가미술품제작소와 조선미술품제작소, 우미이치상회(海市商會), 동화상회(東華商會), 그리고 미츠코시(三越), 조지야(丁子屋), 미나카이(三中井), 화신(和信)백화점 등이 있었다. 이들은 공장에 상품 제작을 위탁하여 판매하거나 제작과 유통을 일원화시키기도 했는데 ‘조선 토산품 판매의 원조’라 자부하였던 우미이치상회는 공예품 제조 공장을 직접 운영하였던 주요 생산자이자 판매자였다.
우미이치상회는 우미이 벤조우(海井辨藏)가 1908년 경성부 본정 2정목(本町 2丁目 99), 즉 지금의 서울 중구 충무로 2가에 문을 연 조선 토산품 판매점이다. 경성 본정에 본점과 2개의 지점을 운영하였으며 조선호텔의 매점에서도 상품을 판매하였다. 이 외에도 대구와 원산을 비롯하여 1913년에는 일본 도쿄 니혼바시(東京 日本橋)에도 지점을 개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사세(社勢)를 확장하여 1923년에는 주식회사 우미이치상회로 회사 이름과 운영 체계를 변경하고 일본 도쿄에 본사를 설립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미이치상회는 단순히 상품만을 판매했던 것이 아니다. 공장을 운영하며 제작에도 직접 관여해 주요 고객이었던 일본인들의 취향을 상품에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제작에서 판매까지의 비용을 최소화하여 보다 큰 이윤을 추구하였다. 상회에서 판매한 나전칠기 안내서에서 나전칠기와 도자기, 백단(白檀), 신선로 공장을 운영하였던 사실과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공장의 명칭이나 위치는 상회의 경영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나전봉황문찬합(螺鈿鳳凰紋重箱)〉 안내서).
『대경성도시대관(大京城都市大觀)』(1937년, 서2303)에 실린 우미이치상회 모습이다.
상점의 중앙 간판에는 ‘海市商會(해시상회)’, 오른쪽에는 ‘みやげ(토산)’이라 쓰여있다.
〈나전봉황문찬합(螺鈿鳳凰紋重箱)〉(서35026)의 포장상자에 부착되어있는 안내서이다.
우미이치상회의 나전칠기와 백단(白檀)공장은 경성부 남산정(南山町), 즉 현재 명동역이 있는 남산동 3가 부근에 위치하였고 도자기공장은 왕십리(往十里), 신선로 공장은 마포(麻浦)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안내서는 주식회사로 운영체제가 변경된 1923년 이전에 작성되어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1937년 『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에는 해시상회 칠기공장이 1925년 창립되었고, 위치는 경성부 태평통 2정목(太平通2丁目, 현재 태평로 2가로 구 삼성본관빌딩 부근)이라 기록되어 있어 회사의 경영 상황에 따라 공장의 운영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미이치상회에서 제작, 판매했던 상품은 어떤 것들이었으며 판매 방식은 어떠했을까? 주요 백화점과 그 밖의 다른 토산품 상점들과 판매 경쟁을 해야 했던 우미이치상회는 신문 광고를 내거나 광고지를 제작하는 등 시각 매체를 통한 홍보에도 적극적인 면모를 보였다. 특히 고객 증정용으로 제작했던 경성 안내 지도, 〈휴대용 시가지도〉(서22356)는 상당히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휴대용 접이식 지도는 편리하고 유용한 안내서 역할을 하였고 상회는 넓은 지면을 활용하여 상품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면에는 지도에 경성 시내의 관광 명소와 교통편, 우미이치상회의 상점과 공장 위치 등을 표시하였고, 뒷면에는 상점의 영업 노하우, 판매 상품의 종류, 가격 등에 관한 상세 정보를 제공하였다.
〈휴대용 시가지도〉(서22356, 1921~1923년, 31.2*45.6cm )
우미이치상회에서 증정용으로 제작한 일종의 경성 시내 관광 안내 지도이다.
이 지도의 광고에 따르면 상회는 “조선물산, 토산품의 대량생산과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원조로 조선물산의 보호 장려에 전력을 다하며 ‘편리(便利)’, ‘친절(懇切)’, ‘박리(薄利)’를 표어로 삼았고 고객에게 무료 포장은 물론 조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인삼탕 한 그릇을 서비스로 제공하였다.” 도자기와 나전칠기, 신선로 외에 인삼과 잣, 백학(白鶴) 제품, 조선풍속인형, 백단(白檀), 상목(桑木) 제품 등을 판매하였고 이 가운데 도자기와 나전칠기의 세부 품목과 가격은 표와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자기] | [나전세공] |
- 花甁(꽃병) : 6원(圓) ~ 150원(圓) - 一輪生(꽃병) : 70전(錢) ~ 5원(圓) - 菓子器(과자그릇) : 3원(圓) 80전(錢) ~ 15원(圓) - 抹茶夏冬(차그릇) : 2원(圓) ~ 10원(圓) - 德利(술병) : 65전(錢) ~ 2원(圓) 50전(錢) - 盃(잔) : 25전(錢) ~ 35전(錢) - 湯吞(차그릇) : 30전(錢) ~ 2원(圓) 20전(錢) - 茶器(차그릇) : 3원(圓) 50전(錢) ~ 6원(圓)
* 1원 = 약12,635원 (1923년 기준, 한국은행경제통계시스템) |
- 會席膳(쟁반) : 65원(圓) ~ 95원(圓) - 花臺(꽃병 받침) : 30원(圓) ~ 150원(圓) - 硯箱(벼루함) : 9원(圓) ~ 60원(圓) - 文庫(문서함) : 15원(圓) ~ 150원(圓) - 尺二寸盆(쟁반) : 5원(圓) ~ 5원(圓) 50전(錢) - 丸盆(둥근쟁반) : 3원(圓) ~ 5원(圓) 90전(錢) - 重箱(찬합) : 35원(圓) ~ 150원(圓) - 名刺受(명함상자) : 2원(圓) 8전(錢) - 菓子器(과자함) : 5원(圓) ~ 7원(圓) 50전(錢) - 莨入(차도구) : 7원(圓) ~ 12원(圓) - 莨盆一對(차도구) : 18원(圓) |
여행 상품으로서의 근대 공예가 일본인의 취향을 고려하여 제작되었음은 나전칠기 기념품의 장식 문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나전풍경문사각반(螺鈿風景紋四角盤)〉(서35039)과 같이 경복궁 경회루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나 전통 놀이를 즐기는 인물 문양으로 장식한 것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향토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에 전근대적인 이미지를 덧입히고자 하는 식민주의적 시각이 담겨있기도 하다. 또한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했던 고고학 발굴조사사업으로 낙랑과 고구려의 고분이 발굴되면서 여기서 출토된 유물들의 문양과 벽화 등이 근대 공예의 문양으로 응용되었다.




〈나전봉황문상자(螺鈿鳳凰紋箱子)〉(서35027, 16.0*16.0*7.7cm)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작을 응용한 문양을 나전으로 장식하였다.
상품은 대부분 나무상자에 포장하여 판매하였으며 상자의 덮개 겉면에는 상품의 종류와 제작처・판매처 이름, 주소 등의 정보를 인쇄한 라벨을 부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미이치상회는 디자인이 약간 다른 두, 세 가지 종류의 라벨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라벨의 글씨는 중국 진나라의 이사(李斯)가 정리한 소전(小篆)을 주로 사용하되 약간씩 변화를 주었다. 옛 글씨를 상징하는 소전은 실제 생활에서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글씨체가 지니는 장식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서예가들의 애호를 받았고 인장(印章)이나 제명(題銘)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그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라벨의 가장자리는 봉황문이나 뇌문으로 장식하였고, 특히 ‘海(해)’자를 활용해 디자인한 고유 마크는 다른 상점과 우미이치상회 상품을 차별화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라벨에 반드시 들어갔다.



〈나전쌍용문상자(螺鈿雙龍紋箱子)〉(서35030), 나전상자 13.0×10.0×5.7cm, / 받침 18.0×15.0×1.5cm
상자와 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이 차를 마실 때 과자를 담는 용도로(菓子器, 과자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덮개는 능화문 테두리 안에 쌍용문을, 몸체는 화문을 나전으로 장식하였다. 상품 라벨에는 ‘조선특산(朝鮮特産), 포착본견지(布着本堅地), 나전칠기(螺鈿漆器)’, ‘우미이치상회(海市商會), 경성 본정(京城 本町)’이라고 쓰여 있는데, ‘포착본견지(布着本堅地)’는 칠공예 제작 기법의 일종으로 우미이치상회의 나전칠기 상품 라벨에 대부분 표기되어 있으며 다른 상회의 상품과 차별화되는 점이다.
우미이치상회는 재조선 일본인을 비롯하여 조선을 방문, 여행하던 일본 관광객이라는 새로운 수요층의 등장에 따라 상품으로서 공예품을 대량 생산·유통함으로써 박리다매(薄利多賣)로 이익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제조 공장을 직접 운영하며 제작과 판매를 일원화시켰으며 상품은 우미이치상회의 상표와 고유 마크를 달고 판매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예품들은 형태와 디자인이 간략화되고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변용된 측면도 있으나 공예 산업으로서의 면모도 갖추게 되었고 급격히 늘어난 수요에 부응하며 이 시기 활동했던 장인들을 통해 전통 공예 기술이 현대로 전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상품으로서 제작된 공예를 불행한 식민지 시대의 산물로 치부하기 보다는 전통을 계승한 근대 공예의 한 축으로 인정해야하며, 일본 자본가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실용성과 상품성의 제고를 위한 전통 공예의 창의적인 응용이라는 차원에서 현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정지희, 「근대 공예품에 대한 인식 전환과 유행」, 『강좌미술사』 55, 2020, pp. 197~219
한단아, 「일제강점기 나전칠기 정책과 제작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0
정서희, 「일제강점기 공예품 연구: 관광기념품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