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도 다는 알지 못하는 명품
- 유물명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도 다는 알지 못하는 명품
- 등록자 유물관리과
- 유물정보 서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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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의 장소와 역사와 기억을 저장하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역사적 층위가 두터운 ‘서울’이라는 공간의 변화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유물을 수집할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 유물이 갖는 ‘장소성’의 요소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일관되게 수집해왔던 유물이 바로 지도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에는 단순히 땅의 생김새만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흔적이 오롯이 쌓여있고 공동체의 세계관을 포함한 사상과 지식, 그리고 염원이 담겨 있는 시각 자료이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 소장 지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 단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꼽을 수 있다. 근대 지도와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세하다고 평가 받는 이 지도는, 김정호가 백두산을 일곱 번 오르고 전국을 세 번 답사한 후 제작하였으며 너무도 정확한 지도의 내용에 놀란 흥선대원군에 의해 지도와 목판이 불태워졌다는 후일담까지 덧붙여져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막상 《대동여지도》의 상세한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고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도 많지 않다. 지도 전체를 펼쳤을 때 세로 약 6m, 가로 약 4m가 넘는 규모로 인해 상설전시를 통한 공개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전시 〈명품도시 한양 보물 100선〉(22.5.20.~22.8.7.)에서 《대동여지도》를 공개하고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1861년 편찬·간행하고 1864년 다시 간행한 22권으로 이뤄진 절첩식(折疊式) 목판본 전국 지도이다. 조선의 국토를 남북 120리(里) 간격의 22층으로 나누어 각 층의 지도를 1권의 첩으로 엮었다. 각 권의 첩은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병풍처럼 펴고 접을 수 있게 만들어 휴대와 열람이 편리하도록 하였다(10리는 오늘날 4.2km 또는 5.4km). 오늘날 30여질의 《대동여지도》가 국내외에 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우리 박물관 소장본은 경도(京都), 즉 한양과 각 도별 인구, 군사, 목장, 창고 등의 통계를 수록하여 서지학적인 가치가 있고 인쇄 상태 또한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아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본들이 22첩인데 비하여 우리 박물관 소장본은 독특하게 21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2첩의 제주도 부분을, 제21첩의 추자도의 서쪽에 배치하여 21첩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연번 |
소장처 |
간행연도 |
판본 |
구성 |
문화재 지정번호(지정연도) |
1 |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
1861 |
목판본 |
22첩 |
보물 제850-1호(1985) |
2 |
서울역사박물관 |
1861 |
목판본 |
21첩 |
보물 제850-2호(2002) |
3 |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
1864 |
목판본 |
22첩 |
보물 제850-3호(2008) |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익숙하면서도 낯선 《대동여지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지도의 첫 번째 첩에 바로 그 해답이 있다. 주황색 능화지로 장정(裝幀)한 표지를 열면 ‘대동여지도’라는 지도의 이름과 간행 연대, 제작자가 밝혀져 있으며 이어서 「지도유설(地圖類說)」이라는 글과 조선 팔도 군현에 관한 통계, 축척을 표시한 ‘방안표(方眼表)’, 범례에 해당하는 ‘지도표(地圖表)’ 한양 지도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와 ‘〈도성도(都城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지도유설」은 《대동여지도》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글로 여기에는 지도에 관한 김정호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는 지도와 지지(地志: 특정 지역의 인문, 지리적 현상을 기록한 서적)의 기원에 관한 글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이 두 자료가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밝혔다.
“대개 지도로 그 형상을 살피고 지리서로 그 수를 밝히었으며 왼편에 지도를 두고 오른편에 서적을 두었으니 참다운 학자의 일이다”
이는 “지지는 지도의 장본(張本), 즉 근원이다”고 하였던 《대동여지도》의 할아버지 격인 《청구도(靑邱圖)》(1834)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는 지도에 대한 김정호의 기본 입장이었다. 이어서 중국 진(晉)나라 배수(裵秀, 224~271)가 쓴 「제지도론(制地圖論)」을 인용해 지도 제작의 원리를 밝힌 후 중국 춘추전국시대 손자(孫子, 기원전 6~5세기 경)의 글을 빌려 지도의 효용에 대해 설명하였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한다.
또한 백성이 여행하고 왕래하기 위해서는 도로의 사정을 알아야 하므로 지도가 필요하다”
이어서 ‘방안표(方眼表)’는 지도상의 거리, 실제 땅의 모습을 지도에 어느 정도 비율로 줄여서 담아냈는지를 보여준다. 지도 한 면에 동일 간격으로 가로선 12줄, 세로선 8줄을 그어 ‘방안’, 즉 ‘모눈’을 만들고, 내부에 ‘한 칸의 거리는 십리([每]方十里)’, ‘지도 한 면의 세로 거리는 120리, 가로 거리는 80리(每片 縱一百二十里 橫八十里)’, ‘대각선 거리는 14리(十四里)’라 적었다. 이를 통해 《대동여지도》의 한 면은 120리×80리 땅의 지리 정보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거리 개념에서 10리를 4.2km 또는 5.4km로 보는 견해에 따라 1:160,000~168,000 또는 1:216,000의 대축척 지도임을 알 수 있다.(방안지 한 칸은 2.5cm : 4.2km 또는 5.4km → 1cm : 1.68km 또는 2.16km)
‘지도표(地圖表)’는 《대동여지도》에 표시되어있는 여러 가지 선이나 기호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정리한 것으로 오늘날 지도의 범례에 해당한다. 14가지 항목을 22개의 기호로 표시하였고 독자의 편의를 위해 기호에 채색을 더하였는데,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등 사용하는 색과 채색 방법은 지도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지도표는 글로 지리정보를 기록한 전통 지도의 지지(地志)적 특성에서 벗어나 기호를 통해 정보를 보다 명료하게 제공하는 새로운 방식을 확립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세계 지도학 통사(The History of Cartography)』에서 한국 지도학(Cartograhpy in Korea) 부분을 집필한 미국의 지도학자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가 지도학적인 명확성이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대동여지도》를 조선시대 가장 우수한 지도라 평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표상의 각종 사물이나 현상을 기호로 표시한 《대동여지도》에는 자연 지리정보와 함께 행정, 국방, 경제, 교통 등에 관한 상세하고 풍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산은 산형도(山形圖)의 표현방식을 응용해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산줄기로 그렸다. 산의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산줄기의 굵기에는 차이를 두어 백두대간을 가장 두텁게 표현하였으며, 산과 산 사이에서 시작해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단선으로 시작하여 강폭이 넓어지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쌍선으로 그렸다. 이러한 자연 지형 위에 사람의 흔적을 기록하였다. 도로는 단선으로 그리되 하천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직선으로 표현하였고 10리 간격마다 점을 찍어 표시함으로써 지역간의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고안하였다. 또한 산지로 갈수록 점 사이 간격을 좁혀 경사가 급해지는 정도까지 나타내었다. 전국 팔도와 그에 속한 부, 목, 군, 현(府牧郡縣) 등 각급 행정단위의 중심지와 그 경계를 표시하였으며 역참, 창고, 목장, 능침 등 행정 정보 비롯하여 곳곳에 산재하는 진과 보, 산성, 봉수 등의 군사 시설을 꼼꼼하게 표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쓰이지 않던 옛 진과 보, 옛 산성의 위치도 기재하였다. 이리하여 《대동여지도》에는 3000여 개의 산과 1,100여 개의 섬, 11,760여개에 이르는 지명이 수록되었고 군현 334개, 다른 행정구역에 둘러싸여 격리된 지역인 월경지(越境地) 74개의 행정 경계선이 점선으로 표시되었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했다. 본디 교묘한 재주가 많았고 지리학에 깊은 취미가 있었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숙하게 그림과 조각을 해서 인쇄하여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하기가 고금(古今)에 비할 것이 없었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동국여지고(東國輿地考)』 10권을 편찬하였는데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정말 애석하다.”
이 글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이 중인(中人) 이하의 신분으로 특이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실려 있는 김정호에 관한 짧은 기록이다. 이 밖에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써준 《청구도(靑邱圖)》 서문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와 저작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까지 과정에는 다양한 상상력이 더해졌고 일반 대중은 그의 남다른 업적을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노력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가 18세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 지도학과 지리학의 성과의 토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의 지도 제작 과정과 성과에 대해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의 지도는 비교적 넓은 지역을 간략하게 나타내는 소축척지도(小縮尺地圖)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또한 넓이와 형태가 제각각인 각 지방을 동일한 크기의 지면 안에 담아냈기 때문에 같은 지도책 안에서도 지도마다 축척이 달랐으며 지역 간 경계를 맞추어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실학자이자 지도학자였던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며 각 도별(道別)지도에 ‘백리척(百里尺)’이라는 일정한 축척을 적용하여 실제 거리를 산출할 수 있고, 도별지도를 이으면 조선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또한 약 1:420,000 축척의 비교적 큰 지도로 제작하여 함경, 평안도 지도의 부정확성을 극복하면서 한반도의 윤곽을 실제에 가깝게 그려내 지도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방안지도의 발달 역시 김정호의 지도 편찬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방안지도는 일정한 거리 간격의 방안좌표를 만들고 지도의 모든 부분이 같은 비율로 그려지게 한 지도로 방안 그 자체가 축척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대축적의 전국지도를 편찬할 수 있는 지도학적 기반이 마련된 것에 더하여, 김정호의 작업에 대한 후원자들의 공감과 적극적인 지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헌종, 철종연간 고위 관료였던 신헌(申憲, 1810~1888),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877)와 최성환(崔珹煥, 1813~1891) 등이 지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였고 재정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축척 된 지도학적인 성과와 동시대 사람들의 후원 속에서 김정호는 평생을 지도 제작과 지리서 편찬에 힘을 쏟으며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1834년 《청구도》를 시작으로 《동여도》(1856~1872)와 《대동여지도》의 전국지도를 제작하였고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61),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등의 전국 지리서를 편찬하였다. 그는 지형의 사실성과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고 사용자가 정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도를 발전시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만든 첫 대축척 전국지도 《청구도》는 2권의 지도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대축척 지도의 크기가 너무 커서 펼쳐보기 힘든 불편함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도면에 나눠 담는 방식이다. 남북을 100리 간격으로 28층으로 나누고 각 층의 지도를 동서 70리 기준으로 나누어 지도책의 한 페이지에 담았으며, 방안선은 그리지 않고 가장자리 부분에 10리 단위로 눈금을 표시하였다. 산과 하천, 읍치, 성곽, 창고, 봉수 등 인문지리적인 정보가 매우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리서의 전통을 따라 각 고을의 호구 수, 토지면적, 세곡(稅穀)의 양, 병력 수,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여 해당 고을의 현황을 바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도와 지리서의 정보를 종합하려 했던 조선 지도학의 전통을 잘 따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리서의 정보를 지도에 가능한 한 통합하려 했던 《청구도》 이후, 김정호는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사용이 편리한 독립된 형태의 지도를 추구하였다. 《동여도》는 《대동여지도》 전에 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축적 전국지도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대동여지도》 제작 이후에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22층의 절첩식 구성과 표현 양식, ‘방안표’와 ‘지도표’를 고안한 점 등에서 《대동여지도》와 유사하며 오히려 7천여 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다. 《청구도》와 달리 도엽(圖葉)을 새롭게 재구성하였으며 제책(制冊)을 보다 합리적으로 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축적된 우리나라 국토 정보와 지식, 지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오랜기간 축적되었던 지도학과 지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로, 당시까지 제작된 지도 중 우리 국토를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구현하면서 기호로 제공할 수 있는 인문지리 정보를 최대로 수록한 목판 지도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작성자 : 정지인 학예연구사>
[참고자료]
양보경, 「《대동여지도》를 만들기까지」, 『한국사시민강좌』 16, 일조각, 1995, pp. 84~121.
양보경, 「대동여지도」, 『한국사시민강좌』 23, 일조각, 1998, pp. 45~59.
개리 레드야드 지음, 장상훈 옮김, 『한국 고지도의 역사』, 소나무, 2011.
국립중앙박물관, 『지도예찬』, 2018.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20주년 기념 한양 명품선』,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