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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053895

 

 

시첩에 담긴 조선시대 귤 향기, 어제갱화첩

 

 

   겨울철 귤만큼 저렴하고 친숙한 과일도 없을 것이다. 가게마다 가득한 낯선 열대과일 속에서 외려 귤은 초라하기도 하고 만만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가장 귀한 과일이라고 하면 역시 귤을 꼽을 수 있었다. ‘황감제(黃柑製)’라고 하여 과거 시험에도 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니, 얼마나 귤이 귀하면 그랬을까. 여기 살펴볼 유물은 1763년 겨울에 영조(英祖)가 황감제를 마치고 수고한 시관(試官)들과 함께 지은 시를 모아 만든 『어제갱화첩(御製賡和帖)』이다. 이 시첩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이제부터 살펴보자.

 

 

제주에서 올라온 진상품

 

   우리나라에서 귤은 주로 제주도에서 재배되는데 먼 옛날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귤의 원산지는 인도에서 중국 남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되며,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에는 제주도로 전파되어 재배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에서만 재배되는 희귀한 과일이었기에 귤은 고려와 조선 시대 내내 제주도의 대표적인 진상품이자 공물이 되었다.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는 당시 제주도에서 귤을 포장하여 진상하는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당시 진상한 생귤만 4만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감귤봉진〉 장면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제주도에서 올라온 귤은 새로 수확한 곡물을 올리는 천신(薦新) 제사에 사용되었으며, 종종 신하들에게 내려지기도 하였다. 특히 매년 음력 12월인 섣달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귤을 나누어주고 시험을 보았는데 이를 황감제라고 한다. ‘황감(黃柑)’은 노란 귤을 뜻하는 말이고, ‘제(製)’는 글 짓는 시험을 뜻한다. 그런데 황감제는 단순히 성균관 유생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은 아니었다. 황감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유생들은 과거시험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직부란 문과(文科) 시험의 2차 시험이나 최종 시험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하는데, 최종 시험인 전시에 직부하게 되면 급제가 보장되었으니 대단한 특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동신 시권」(서울역사16201) 

1783년 황감제에서 정동신이 제출한 답안지이다. 1등인 거수(居首)를 차지하여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763년 겨울의 황감제

 

   1763년 겨울에도 예년과 같이 제주도에서 진상귤이 올라왔다. 음력 12월 9일 영조는 창덕궁(昌德宮)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귤을 올렸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곳으로, 당시에는 숙종(肅宗)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영조는 새로 수확한 귤을 먼저 부왕에게 올려 차례를 지낸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영조는 경희궁(慶熙宮)에 행차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이게 하고는 황감제를 열었다. 제주도에서 올라온 귀한 귤을 유생들에게 내리고, 이어 영조가 직접 낸 시험 주제인 시제(試題)를 공개하여 시험이 시작되었다. 상큼한 귤향기와 은근한 묵향이 섞인 경희궁의 뜰 안에서 유생들은 붓을 들어 답안지인 시권(試卷)을 채워나갔다.

 

 

시관들에게 음식을 내린 영조

 

   시험이 끝나자 시관들은 유생들이 제출한 시권을 모아 경현당(景賢堂)에서 채점을 하였다. 꼼꼼히 채점을 마치자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다. 영조는 돌아가려는 시관들을 불러 모아 몇 가지 음식을 내렸다. 왕이 평소 즐기는 흰죽과 무국에 꿩구이를 더했으니, 소박하면서도 특별한 음식들이었다. 영조는 이날의 감흥을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하였다.

 

 

 

 

칠순 나이에 감귤을 내리니, 계미년 겨울 섣달이라.

보루각은 한밤을 알리고, 임금과 신하는 음식을 함께 먹네.

옛적 동한 광무제는 쫓기던 무루정에서 콩죽을 먹었고,

지금은 군신이 한 당에 모여 먹으니, 태평한 날을 보는구나.

 

 

 

 

 

『어제갱화첩』 중 영조의 시

영조의 친필을 모사한 것이다.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나라를 세우기 전, 적에게 쫓기던 무루정(無蔞亭)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있다가 그를 따르던 장수 풍이(馮異)가 바친 콩죽을 먹고 기운을 차려 건국의 위업을 이룩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날 저녁의 모습을 광무제의 옛 고사에 빗대 군신 간의 정을 두터이 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영조는 자신이 지은 시에 신하들이 화답하여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영조는 특별한 날마다 이처럼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갱재(賡載) 또는 갱화(賡和)라고 한다. ‘갱’은 잇는다는 뜻이고, ‘재’는 완성한다는 뜻이며, ‘화’는 화답한다는 뜻이다. 시관들이 올린 시 가운데 우의정 김상복(金相福)이 지은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감귤을 내려주시니, 올해 섣달이라.

왕께서 친히 선비들을 시험 보시고, 신하들은 임금 모시고 음식을 먹네.

은혜는 넘치되 음식은 검소하니, 꿩구이와 따뜻한 죽이로다.

배불리 먹은 저녁, 우러러보니 성상 모습 햇살 같도다.

 

 

 

 

『어제갱화첩』 중 김상복의 시

영조의 시와 동일하게 ‘감귤[柑]’, ‘섣달[臘]’, ‘먹다[食]’ 등의 운자를

                                          사용하였다.

 

 

 

 

 

   김상복의 시에는 음식을 내려준 임금의 은혜를 칭송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이날 시관들은 지은 시를 모아서 여러 개의 첩(帖)으로 만들고 나누어 가졌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어제갱화첩』이 바로 당시에 만들어진 시첩이다. 첩의 첫머리에는 앞서 살펴본 영조의 친필 어제시를 모사(模寫)하여 수록하였고, 다음으로 시관들이 화답한 시 11수를 차례로 필사하였다. 마지막에는 황감제를 주관한 김상복이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록한 지문(識文)이 있다.

 

   겨울마다 열리는 황감제가 있었기에 성균관 유생들은 1년에 한 번이나마 귤을 맛볼 수 있었다. 살펴본 것처럼 귀한 귤과 음식을 하사받은 유생과 신하들은 임금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였다. 어느덧 시절이 좋아져 귤을 귀한 과일이라 하기에는 어색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겨울마다 넉넉하게 쟁여 놓는 과일이 되었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 아닐까.

 

<작성자 : 송철호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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