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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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역사

조선후기

  •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광해군 때 왕궁을 지어 경덕궁이라 부르다 1760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280여년 동안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과 더불어 서궐의 위치에서 양대 궁궐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입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이곳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 고종 때에는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정당 등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훼철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습니다.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 1902년경

경희궁과 경운궁을 잇는 홍교, 1902년경

숭정전의 옛모습(현재의 동국대학교 정각원)

숭정전의 옛모습(현재의 동국대학교 정각원)

일제강점기

경희궁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면서 경복궁과 더불어 총독부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웠으며,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습니다. 이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등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마저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되고,또 경희궁 부지 2만 5천여 평을 떼어내어 전매국 관시를 지음에 따라 경희궁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때 이곳에 경희궁이라는 궁궐이 있었다는 의미인 '경희궁터'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통감부중학교를 짓기위해 헐리는 경희궁 , 1907년경

통감부중학교를 짓기위해 헐리는 경희궁 , 1907년경

사적 지정

1980년 9월 경희궁터가 사적 제 271호로 지정된 이후, 1985년 6월 건설부 고시 제258호로 공원지정이 되었고, 서울시립박물관 · 미술관을 이곳에 짓기로
결정함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986년 현대건설로부터 경희궁터를 교환 방식으로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희궁 복원 및 박물관 · 미술관 건립 공사에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경희궁터의 유구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복원 가능한 건물과 박물관의 위치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경희궁지의 옛모습 (1972년 항공사진)

경희궁지의 옛모습 (1972년 항공사진)

시굴성격의 경희궁터 발굴조사

서울시에서는「경희궁지 복원과 시민사적공원 조성계획」에 따라 1985년과 1987년 두 차례에 걸쳐 경희궁터 유구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유구발굴 조사는 단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담당하였습니다. 1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5년 8월 7일부터 11월 20일 사이에 진행되었는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위한 시굴'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아직까지 옛 서울고 건물들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이를 제외한 지역을 대상으로 유구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숭정전의 상하 월대 중 하월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일부와 어계(御階), 동쪽 행랑의 초석2점, 서쪽 회랑 아래쪽의 암거(暗渠) 배수구, 숭정문터의 적심석 6기와 숭정문의 계석지(階石址)등 여러 유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발굴과정에서 기와 조각과 자기 조각 등 1,000여 점의 유물을 출토하였습니다.
1차 조사에서는 숭정전 일대의 복원 가능성을 확인한 점이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차 유구발굴 조사는 1986년 6월 홍익대학교 부설 환경개발연구원에서 수행한「경희궁 근린공원조성 기본계획」에 따라 1986년 12월 29일부터 1987년 6월 30일 사이에 진행하였습니다.
1차 발굴지역을 제외한 경희궁터 전역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2개의 건물지, 담당지, 배수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두 차례의 유구발굴 조사를 통해 확보한 유물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것으로 17세기에 해당하는 유물이 많았습니다.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터 발굴조사

  • 숭정전과 숭정문, 동서남북 회랑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는 1985년부터 7차례 실시하였습니다.
    1985년과 1987년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국대 박물관에서 수행하였으며, 이후 1988년부터 1994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는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담당하였습니다.
  •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는 1988년 12월~1989년 5월 사이에「숭정전 건립부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단국대 박물관의 조사 때 발굴하였던 월대석을 노출하였고, 당시까지 계단으로 사용하고 있던 어계는 숭정전 건물과는 축을 달리하고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또한 애초의 추정과 달리 숭정전은 옛 서울고의 신관 건물이 아니라 식당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 동 연구소에서는 1989년 10월~12월 사이에 숭정전의 동서 월량과 상하 월대의 유구를 발굴하기 위해 '경희궁 숭정전 발굴조사'를 행하여, 상하 월대의 일부분과 동서 월량의 주칸 및 칸 사이를 알려주는 초석을 발견하였고, 월랑이 복랑(複廊)으로 되어 있으며 숭정전으로부터의 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 1990년 3월~5월에는, 이전 발굴 때 철거되지 않아 발굴하지 못했던 강당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숭정문과 그 주위의 기단, 동쪽과 남쪽의 월랑 위치를 확인할 목적으로 '숭정문지 및 남회랑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숭정문 앞 하월대의 최하단 및 2단을 구성하는 1열의 장대석들과 계단터 동쪽 모서리에서 동쪽으로 향해 있는 화계를 발굴하였습니다.
  • 1991년 11월~1992년 8월에는「자정문지 및 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숭정전의 서북쪽 회랑 터 아래로 장대석으로 잘 조영된 암거(暗渠)배수구가 지나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 외 적심석 몇 개를 발굴하였습니다.
  • 1993년 11월~1994년 2월에는 YMCA건물과 유류고가 철거됨에 따라 숭정전의 서쪽과 북쪽의 회랑 터를 발굴하기 위해 '자정전지 및 숭정전 서북회랑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발굴 결과 숭정전 북쪽 회랑 터에서 초석 4기를 비롯하여 적심 5기 등 화방벽으로 구획된 건물 터를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건물 터 좌우에서 초석 7기를 비롯하여 바닥에 전돌이 깔린 양호한 상태의 천랑(穿廊)터를 발굴하였습니다.
  • 자정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1991년 11월~12월, 1993년 11월~1994년 2월과 1995년 7월~1996년 1월에 걸쳐 세 차례 진행하였습니다. 1차 조사에서는 자정문 터 아래로 암거 배수구가 지나고 있다는 사실과 자정문의 서쪽 기단이 잘 남아 있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2차 조사에서 자정전이 있었음을 확인해주는 기단의 장대석을 일부 발굴하였습니다. 3차 조사에서는 자정전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부분과 서쪽 부분, 그리고 자정전 북쪽에 해당하는 옛 서울고 소운동장을 발굴하였으나 큰 소득은 없었습니다. 다만 숭정전 서쪽 회랑으로부터 약 11m 떨어진 곳에서 회랑 터로 추정되는 1칸의 구들자리를 발굴하였습니다.
  • 태령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 역시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1996년 10월~1997년 4월 사이에 실시하였습니다. 10개의 줄구덩이를 파서 유구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태령전의 위치와 규모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배수로와 적심 3기, 적심석 등을 발굴한 것과, 옛 서울고의 신관과 화장실을 세우면서 설치했던 콘크리트 옹벽에 묻혀 있던 영렬천(靈洌泉)을 발굴한 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희궁 복원사업

이같은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경희궁내 각 전각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1987년에는 흥화문을, 1991년에는 숭정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그 일곽은 2000년에 각각 경희궁내에 복원하였습니다.
다만 흥화문은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위치한 관계로 원위치에 옮길 수가 없어 서쪽으로 100여m 이동하여 복원하였습니다.

흥화문(박문사 정문),1930년대 현재의 흥화문
서울역사박물관 SNS